“탈북민, 이주민 등 디아스포라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뿐 이미 한국에서도 일상에서 늘 마주치는 존재들입니다. 이들과 공존을 모색해야 합니다.”
미국에서 태어나 네 살 때 한국에 와 어린 시절을 보내다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커리어를 쌓아가는 사람의 정체성은 한국인일까, 미국인일까? 서류상 국적은 미국인이지만,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한국계 미국인과는 또 다르다. “나는 어떤 한인일까”라는 물음을 품고 지낸 이는 다큐멘터리 영화 ‘헤로니모’(2019년)를 연출한 전후석 감독(37)이다. 최근 에세이 ‘당신의 수식어’(창비)를 펴낸 그는 다른 디아스포라를 만나며 키운 사유를 풍성하게 풀어 놨다. 16일 그를 전화로 인터뷰했다.
“미국에서 로스쿨에 다닐 때 백인 일색인 학교에서 아시아계 학생들은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하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어요. 저도 3년 내내 선거에 나갔지만 매번 꼴찌만 했죠.”
그는 로스쿨에 다니던 2000년대 후반을 회상하며 말했다.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한 뒤 사회 정의를 위해 일하고 싶어 로스쿨에 진학했다. 그러나 사회 이슈에 대해 발언하려 해도 백인 사회가 자신을 동등한 미국인으로 여기지 않는 한 소수 민족의 일원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느꼈다.
그런 그의 인생에 ‘헤로니모 임’(임은조·1926∼2006)이라는 존재가 나타나며 가치관은 완전히 달라졌다. 2015년 쿠바 여행에서 우연히 만난 한인의 조부. 쿠바에서 태어나 사회주의 혁명가로 살다 쿠바 한인 후손의 한국어 및 민족문화 교육에 헌신한 인물이다. 그의 일대기를 담은 영화 ‘헤로니모’는 그렇게 탄생했다. 쿠바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면서도 한인의 정체성을 잃지 않은 헤로니모에게서 전 감독은 자신의 정체성도 선명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봤다. ‘디아스포라적 사유’의 시작이었다.
민족의 개념을 국경에 얽매이지 않고 상상하는 것, 그래서 누군가의 정체성은 다양할 수 있다는 걸 아는 게 그가 말하는 디아스포라적 사유다. 이를테면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한국으로 봉환하는 대신 카자흐스탄에 두는 게 한민족에게 이로울 수도 있다는 것. 그는 “세계 각국의 한인 선조들이 있던 곳에 존재해야 ‘우리’라는 범주를 한반도 너머로 넓힐 수 있다”고 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건 단순히 자신이 디아스포라여서가 아니라 자신과 다른 국적, 정체성을 가진 디아스포라를 만난 경험 덕분이라고 했다. 달리 말하면 디아스포라가 아니더라도 디아스포라적 시각을 갖출 여지는 충분하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디아스포라적 사유를 확장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조선족, 고려인, 탈북자, 이주 노동자 등을 이웃으로 두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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