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10월 12일 경성 정동에 있는 이화학당에서 비밀회의가 열렸습니다. 기독교계 학교를 운영하는 외국인 선교사들이 주로 모였죠. 이들은 조선총독부가 요청한 13일 ‘영대봉영식(靈代奉迎式)’에 학생들을 보내지 않겠다고 결의했습니다. 영대봉영식은 ‘영대’를 받들어 맞아들이는 의식이고 ‘영대’는 거울이었죠. 일본 신(神)이 깃들었다고 합니다. 많은 선교사들이 영대봉영식에 참석한다면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계율을 어기는 셈이라고 판단했죠. 참석하자는 의견도 일부 있었지만 원칙론이 이겼습니다. 나아가 15일 참배행사에도 가지 않겠다고 못을 박았죠. 연희전문 세브란스의전 배재학교 경신학교 이화학교 정신여학교 배화학교가 행동을 통일했습니다.
비밀회의 이틀 뒤에는 ‘진좌제(鎭座祭)’가 예정돼 있었습니다. 이미 경성 남산 중턱에는 거대한 조선신궁(朝鮮神宮)이 자리 잡은 상태였죠. 진좌제는 조선신궁의 준공식 행사입니다. 일제가 국가신도의 우산을 한민족 위에 들씌우겠다는 의식이었죠. 일본 곳곳에 있는 신사(神社)에는 일본인 저마다의 조상신이 모셔져 있다고 합니다.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국가신도가 등장하면서 종교와 정치가 하나가 되는 제정일치(祭政一致)체제가 성립했죠. 이후 각지의 신사들은 피라미드식으로 서열이 정해집니다. 또 일제는 식민지마다 대표 신사를 세웠죠. 홋카이도에는 삿포로신사를, 청일전쟁 전리품으로 얻은 대만에는 대만신사를 지었죠. 러일전쟁에서 확보한 사할린에는 화태신사를 세웠습니다. 이제 조선에도 들어선 겁니다.
조선 대표 신사가 세워진 남산은 그맘때 일본 거류민들의 뒷동산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갑신정변으로 맺은 1885년 한성조약 이후 일본인들이 몰려오면서 청계천 남쪽인 ‘남촌’에 밀집해 살았거든요. 실제로 남산에는 일본인들을 위한 공원이 조성돼 있었죠. 일본인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신사도 생겼습니다. 1898년 남산대신궁이었죠.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일본인들이 자발적으로 세웠습니다. 1925년 말이 되면 크고 작은 신사가 모두 150개에 이르렀다죠. 조선 대표 신사는 일제가 나라를 빼앗은 뒤부터 지으려고 했습니다. 마침내 1920년 남산 북사면 42만여㎡에 착공했죠. 5년 뒤 경성 어디서나 쳐다보이는 남산 중턱에 384개의 돌계단을 올라가면 닿는 거대한 신사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일제는 이 신사에 일본 최고신인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神)와 조선에 문명을 가져왔다는 메이지천황을 두었습니다. 이름도 최고 신사답게 조선신궁이라고 고쳤죠. 기존 남산대신궁은 경성신사로 바꿨고요. 진좌제가 열린 10월 15일을 임시공휴일로 했고 다이쇼천황이 칙사도 파견했습니다. 총독 등 고관들이 두 신이 영원히 조선반도를 지켜준다는 진좌제에 참석했죠. 남대문과 주요 건물들은 전등으로 장식했고 꽃단장한 전차와 자동차들이 오갔습니다. 3만2000명이 넘는 학생들은 낮에는 일장기를, 밤에는 등불을 들고 행진했죠. 남대문정거장에서 새롭게 재탄생한 경성역에 제일착으로 들어온 기차에 위에서 말한 영대가 실렸습니다. 경성부립대운동장이 때맞춰 개장하고 각종 축하행사를 했죠.
앞서 충남 강경보통학교 교사가 학생들에게 지역 신사에 참배하라고 해 문제가 됐습니다. 동아일보는 ‘강제참배문제’ 상, 하 사설에서 ‘순진한 아동들에게 강제하여 숭배심을 일으키려는 것은 교육인가, 폭행인가’라고 따졌죠. 이번에도 ‘신앙은 자유’ 사설에서 ‘신사는 일종의 신앙임이 분명하므로 타인이 간섭하거나 바꿀 수가 없다’며 기독교계 학교들의 신앙의 자유를 존중하라고 촉구했습니다. 하지만 사직단 제사를 없애고 종교까지 공인대상으로 삼은데다 조선신궁 위에 있던 국사당까지 쫓아낸 일제는 개의치 않았죠. 조선신궁을 통해 한국인을 신도체제에 동화시켜 나갔고 노골적인 참배를 강요해 ‘종교전쟁’을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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