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오래 먹는 국으로 육개장을 꼽을 수 있다. 어릴 적 생일이 돌아오면 엄마는 아침 생일상에서 어떤 국을 먹고 싶은지 선택지를 주셨다. 세상 모든 국들 가운데 고를 수 있는 질문 같지만 우리 육남매는 그 선택이 미역국과 육개장 중 하나임을 암묵적으로 알고 있었다. 다행히 가족 모두 엄마의 육개장을 무척 좋아했다. 우리 집 육개장에는 특이하게도 소 내장과 부추가 듬뿍 들어있었다. 어릴 적에는 육개장 맛을 특별하게 해준 엄마의 비법이라고 여겼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당시 고기보다 내장 값이 저렴해 넣지 않으셨을까 짐작한다. 1924년에 출간된 요리책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의 국물요리 부분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것도 육개장이다. 그런데 여기에 각종 내장이 들어간 요리법이 소개돼 있는 게 아닌가. 비록 내장을 듬뿍 넣은 육개장이 우리 집만의 비법은 아니었다는 게 드러났지만 추억 속 내장 육개장의 국물 맛은 깊고 진했다. 요즘 식당에서 파는 육개장은 기름이 많은 핏빛 국물로 고추기름을 헤치고 먹을 때가 있다. 장례식장 육개장은 뭇국인지 고깃국인지 국의 정체성이 모호하다.
그러던 중 경기 양평군에 나들이를 갔다가 탁하지 않고 붉은 기름도 뜨지 않으면서 집에서 끓인 것 같은 시원한 육개장을 만났다. 순한 붉은빛의 얼큰한 국물이다. 테이블에 놓인 돌솥에서 아직 끓고 있는 대파와 버섯 고명만 봐선 평범해 보였다. 알고 보니 이 맛은 양수역 인근에서 3대를 걸쳐 나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육개장 집 김승희 사장은 젊었을 때 의류업을 했지만 이후 외식업으로 전환해 20년 넘는 경력을 쌓았다. 옛날 양수리 우시장에서 순대를 만들던 할머니와 간판도 없이 역전식당으로 불린 음식점에서 손맛을 자랑한 어머니의 솜씨를 이어받았는지도 모르겠다. 6년 전 어머니가 운영하던 식당을 물려받아 본인 나름의 노하우를 보태 깔끔한 육수를 기본으로 하는 샤부샤부와 육개장을 내놓고 있다. 봄에 엄나무 순, 두릅나무 순을 따서 보관했다가 내오는 밑반찬은 어머니에게 배운 요리의 흔적이다. 양평의 지평면 수곡리에서 느타리버섯을 구해 듬뿍 사용하기에 버섯육개장이라고 불린다.
식당 한쪽에는 어머니가 운영하던 양수역 앞 목로주점, 간판 없는 식당에 대해 쓴 정호영 시인의 시가 걸려 있다. ‘여객 손님보다 마을사람 모이는 곳/돼지부속에 막걸리 한 잔/토박이와 낯선 이 어울려/정을 부딪치는 곳’이라는 구절이 보인다.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지만 김 사장은 두물머리 양수역 인근에서 그 맛과 정을 이어가고 있다.
양평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인적의 흐름이 끊이지 않은 곳이다. 조선시대 한양 선비들이 금강산으로 유람을 떠날 때 양평을 거치면서 산수에 대한 시를 지었다. 또 강원도에서 올라가는 진상품은 한양에 도착하기 전 양평에서 쉬어가야 했다. 지금은 서울에서 가까운 물 맑고 아름다운 곳이기에 자전거나 자가용을 타고 사람들이 몰리는 양평이다. 예나 지금이나 토박이와 낯선 이의 만남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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