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작가 히라코 개인전 ‘마리아나 산’
동화적이면서 스산한 분위기
“환경에 대한 다양한 관점 담아”
달무리가 진 밤, 색색의 꽃과 풀이 바람에 흩어져 날아간다. 나부끼는 수풀들 사이로 똑바로 선 사람. 아니, 나무. 그는 ‘MY PLANET’라 적힌 티셔츠를 통해 무언가를 넌지시 알린다. 이곳은 실존하는 곳일까. 사람이 살 수는 있는 곳일까.
회화 작품 ‘Lost in Thought 64’(2021년)에서 보듯 히라코 유이치(平子雄一·39·사진)는 인간과 자연의 공존 같은 거대 담론을 화폭에 끌어들인다. 그의 작품세계에 항상 출연하는 이는 ‘트리맨(Tree Man)’. 인간이 나무를 뒤집어쓴 것 같기도, 인간을 닮은 나무 같기도 한 묘한 이미지다. 히라코는 서울 용산구 갤러리바톤에서 개인전 ‘마리아나 산’을 열고 트리맨을 소재로 한 17점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자연이 반영된 작품은 그의 경험에 따른 것이다. 히라코는 산지가 발달한 일본 오카야마현 출신이다. 최근 동아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그는 “산기슭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아버지 집안이 대대로 어부여서 배를 자주 탔다. 자연은 어릴 때부터 나와 매우 가까운 존재”라고 했다. 6년간의 영국 생활도 그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인간의 정신적 위안을 위해 꾸며진 자연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는 것. 그는 “도시에서 자연은 본연의 모습이 아닌 복제품, 혹은 일부만으로 존재한다. 도심 공원을 거닐던 친구가 ‘역시 자연이 좋다’고 이야기했는데 그 말이 수년 동안 신경 쓰였다”고 말했다.
그는 작품에서 식물의 처지에 깊이 몰입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회화 ‘Gift 15’(2021년)는 꽃의 입장에서 선물이 갖는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축하할 때 꽃다발을 건네곤 한다. 하지만 이는 꽃 생명의 마감을 뜻한다. 작품에서 꽃다발 뒤에 놓인 액자들은 한때 화려한 생명력을 유지한 꽃들의 영정사진처럼 보인다. 삶이 얼마 남지 않은 꽃다발이지만 품에는 또 다른 생명을 끌어안고 있다. 가로 333.3cm, 세로 248.5cm의 큰 캔버스에 담긴 이 역설적인 장면은 관람객들에게 살아있는 것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의미는 다소 무겁지만 작품 자체는 동화적이다. 회색에 가까운 하늘색 등 현실에서 보기 어려운 색감 때문이다. 그렇다고 낭만적이란 뜻은 아니다. 오히려 스산하다. 히라코는 ‘Lost in Thought’ 연작을 통해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지구 저편을 그린다. 연작 중에는 흑백사진 같은 작품도 있어 자연이 주는 색의 아름다움을 강조한다. 설화를 연상시키는 설정은 전시 제목에서도 드러난다. ‘마리아나 산’은 실제로 존재하는 지명이 아니다. 지구에서 가장 깊은 태평양 마리아나해구에서 착안한 가상의 공간이다.
히라코는 “식물과 자연에 관한 논문, 뉴스부터 동네 주민들의 화분까지 다양한 곳에서 작품의 영감을 얻는다”고 했다. 환경 문제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지만 그의 작품에 고발의 느낌은 별로 없다. 그는 “내 역할은 환경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작품에 녹여내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시는 다음 달 16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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