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기 목사는 한국 교회의 부흥과 세계 교회의 성장을 주도한 개신교 선교사의 대표적 인물이다. 14일 아침 7시13분 서울대병원에서 별세한 고인이 설립한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세계 최대 규모의 교회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바 있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1958년 천막교회, 1961년 서대문교회, 1973년 여의도순복음교회로 규모를 폭발적으로 키워갔다. 이런 성장의 중심에는 언제나 카리스마 넘치는 조용기 목사의 리더십이 있었다.
◇ 1958년 가정집 거실서 열린 창립예배엔 비 피하러 온 할머니 1명뿐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시작은 195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의도 순복음교회는 1958년 5월18일 서대문구(현 은평구) 대조동에 위치했던 최자실 전도사의 집 거실에서 가정예배의 형태로 창립예배를 드림으로서 시작한다.
최자실 전도사는 창립예배를 드리던 날 아침부터 온동네를 다니며 예배를 알렸지만 창립 예배에 참석한 사람은 밭일을 하다가 비를 피하려고 온 할머니가 전부였다.
한 달이 지나자 성도가 50여명에 이르러 거실에서 예배를 드리기 어려워졌다. 이에 조용기 전도사와 최자실 전도사는 집 앞 마당에 천막을 치고 가마니를 바닥에 깔고 예배를 드리게 됐다. 천막교회의 시작이었다.
이후 천막교회는 부흥하여 점점 더 많은 성도들이 모이게 되자 가난한 성도들이 드린 헌금을 모아 더 큰 천막을 구입해 천막을 넓혀 가는 일을 계속했다.
◇ 1961년 부흥성회 계기로 서대문로터리에 순복음부흥회관 설립
조용기 목사가 탈장으로 인해 군에서 전역한 이후, 순복음교회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고인이 전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61년 9월1일, 서대문 로타리 공터에서 천막 대부흥성회가 열렸다. 조 목사는 통역을 맡았다.
조용기 목사는 부흥성회에 몰려든 성도들을 보고 서대문에 교회를 개척할 것을 결심한다. 1961년 10월15일 부흥회가 열린 장소에 순복음부흥회관이라 불리는 교회가 세워졌다.
고인은 1962년 4월26일 목사 안수를 받는다. 이에 5월13일 순복음부흥회관의 명칭이 순복음중앙교회로 바뀌고 교회 성도가 5백명을 넘어서게 됐다. 3년 후인 1964년 순복음부흥회관의 성도는 3000명에 이르게 됐고 1만명을 초과하자 새로운 교회 장소를 찾아야 했다.
◇ 비행기 이착륙하던 여의도에서 기적을 일구다…1981년 성도 20만명 넘겨
당시 여의도는 단지 비행기가 이착륙하는 활주로로 이용되는 황폐한 섬이었다. 육지와 연결되는 다리조차도 없었기 때문에 교통이 가장 큰 문제였다. 조용기 목사는 하나님으로부터 기도의 응답을 바탕으로 여의도에 건물을 세우겠다는 계획을 강하게 추진했다.
1973년 8월19일 현재의 여의도에서 최초의 예배가 드려졌다. 같은해 9월18일부터 22일까지 한국성도 5만명과 외국인 50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10차 세계오순절대회가 여의도순복음교회와 효창운동장에서 열렸다. 이 대회는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는 조용기 목사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위상을 세계에 알리는 결정적 계기였다.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성장세는 더욱 가팔라졌다. 1979년에 10만명, 1981년에 20만명을 넘어섰다. 특히 고인은 1976년에 세계교회성장기구 CGI(Church Growth International)를 설립해 세계 교회 성장의 발판을 만들었다. 당시 세계에서 성장하는 교회들의 대부분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후에도 폭발적인 성장세는 계속됐고 1993년 여의도순복음교회는 교인수 70만명을 넘어서며 세계 최대의 교회로 기네스북에 등재되기까지 했다.
한편 고 조용기 목사의 장례는 5일장으로 치러진다. 빈소는 여의도순복음교회 대성전 1층 베다니홀에 마련되며 조문은 15일 오전 7시부터 가능하다. 천국환소예배(장례예배)는 18일 오전 8시 한국교회장으로 여의도순복음교회 대성전에서 열리며, 극동봉상 이사장 김장환 목사가 설교한다. 장례위원장은 한국교회총연합 대표회장 장종현·이철·소강석 목사가 맡았다. 하관예배는 18일 오전 10시 장지인 파주시 오산리최자실국제금식기도원 묘원에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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