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미에현(三重縣)의 ‘구마노(熊野) 3산’은 성지로 꼽히는 곳입니다. 1925년 1월 구마노시와 가까운 기모토(木本)마을에서 터널공사가 시작됐습니다. 이세(伊勢)신궁에서 고개를 넘지 않고 구마노 3산으로 참배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죠. 조선인들도 많게는 200명 정도 일하고 있었습니다. 1926년 1월 2일 밤 19세 조선인 청년이 마을 극장을 찾아가 친구를 만나겠다고 하자 일본인 흥행주가 안 된다고 했습니다. 말싸움 도중 갑자기 일본인이 흉기를 꺼내 청년을 찔렀습니다. 이내 조선인들과 일본인들 간의 편싸움으로 번졌고 다음날에는 일본인들이 조선인 합숙소를 습격했습니다. 인부 한 명이 목숨을 잃었죠. 누군가 마을의 종을 울려 일본인 주민까지 몰려나와 가세했고 또 다른 조선인 한 명을 무차별 살해했습니다.
조선인들은 발파용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리며 저항했지만 수가 적어 산이나 터널 속으로 도망쳤습니다. 사흘 동안 일본인 재향군인회 소방대 자경단 청년단 등이 이들을 쫓아다녔죠. 마치 ‘조선인 사냥’이 벌어진 듯했습니다. 부상자가 속출하자 일본 경찰은 조선인들을 배에 태워 다른 곳으로 보냈습니다. 좋게 말하면 ‘피신’이고 나쁘게 말하면 ‘추방’이었죠. 목숨을 잃은 두 조선인 유해는 눈 오는 산속에 방치돼 일본인들에게 여러 차례 훼손당했습니다. 12일이 지나도록 유족들이 찾아오지도 못한 채 결국 화장됐죠. 희생자 한 명의 아내는 아이 하나에 임신까지 한 상태로 집안의 기둥을 잃어버린 신세가 됐습니다. 동아일보는 ‘아이 업고 아기 배고 남의 땅에서 우는 여자’ 제목으로 이 여인의 안타까운 처지를 전했습니다.
‘기모토 학살’ 소식이 전해지면서 안팎의 동포들은 피가 끓어올랐습니다. 당장 진상조사에 착수하겠다고 소매를 걷어붙였죠. 하지만 경성의 조선노농총동맹이 주도한 사건조사회 창립총회는 일제가 금지했고 인쇄물도 압수했습니다. 그래도 일본 도쿄나 교토, 오사카에 있는 각종 조선인 단체, 특히 사회주의 단체들은 조사회를 구성해 조사위원을 현지로 파견할 수 있었습니다. 도쿄의 일본인 변호사들로 구성된 자유법조단에서도 후세 다쓰지 변호사를 파견하는 등 지원에 나섰죠. 그러나 이들의 조사보고회는 일본 경찰이 연설을 수시로 중단한 끝에 결국 해산시켰습니다. 화가 난 청중은 경찰을 향해 ‘우리는 죽어도 다 같이 죽을테니 네 마음대로 하라’고 맞섰지만 공권력을 당할 수는 없었죠.
일본의 조선인들에게 ‘기모토 사건’은 3년 전 ‘간토 학살’(동아플래시100 2020년 12월 26일자)과 4년 전 ‘니가타현 학살’(2020년 10월 3일자)을 떠올리게 하는 악몽과 같았습니다. ‘기모토 학살’과 ‘간토 학살’에서는 무엇보다 조선인들이 떼를 지어 방화 폭행 등을 한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습니다. 간토 학살 때는 ‘폭동을 일으켰다’ ‘우물에 독약을 풀었다’는 헛소문이 퍼졌고 기모토에서는 평소 무전취식을 일삼고 건방지게 활보하는 조선인들이 ‘복수하러 습격해 온다’는 말이 돌았죠. 이 때문에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폭력을 정당방위로 여겼습니다. 자경단이 나서고 경찰까지 가세한 배경이었죠. 제3자인 후세 변호사는 ‘간토대지진 당시의 조선인학살처럼 기모토 주민들의 광기어린 분위기가 있었다’고 냉정하게 진단했죠.
기모토 사건은 이주자나 난민이 쏟아지는 지금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시사점을 줍니다. 하지만 당시 동포들이 목숨 걸고 일본으로 건너가게 만든 식민지 조선의 극심한 차별구조를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동아일보는 ‘도일 노동동포, 미에현사건의 교훈’ 상, 하 사설에서 이 점을 지적했죠. 조선인들이 고향에서 살 길을 만들어 주지 않고 일본행만 막는 일제의 행정조치는 두고두고 어리석은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고 했죠. 간신히 건너간 조선인 노동자는 로마 노예계급이 세대를 건너뛰어 다시 나타난 것과 같은 처지라고도 했습니다. 재일조선노동자의 조직과 운동을 통한 자구노력 또한 절실하다고 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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