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 때 기억해야 할 것[내가 만난 名문장/정유정]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0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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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엄버 워어어언, 당시인의 너엄버 워어언 패애애앤….”

―스티븐 킹 ‘미저리’ 중

첫 문장은 작가에게 가장 어려운 숙제다. 첫 문장이 명문장이 되기는 더욱 어렵다. 앞으로 펼칠 이야기와 주제를 암시해야 하고, 문장 자체로 어떤 메시지를 품고 있어야 하며, 한 방에 눈에 박히는 강렬한 표피를 가져야 한다. 이를 쉬운 단어 몇 개로 구현한다는 건, 문학적 기술을 넘어 마술에 가깝다.

‘넘버 원, 당신의 넘버 원 팬’이라는 대사를, 으스스한 리듬으로 늘여놓은 ‘미저리’의 첫 문장은 인물의 성격부터 의심하게 만든다. 혹시 미친 자인가. 주정뱅이인가. 팬이라 주장하는 악질 스토커인가. 아울러 이 소설이 넘버 원 팬이 벌이는 생존게임일 거라는 기대를 갖게 만든다. 그리고 기대는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소설의 줄거리를 한 줄로 요약하면 ‘어느 사생팬의 미친 짓’ 정도가 될까.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살 떨리는 서스펜스에 지배돼 있었다. 팬의 이름으로 저지르는 애니의 악행이 지금, 여기에서, 내가 당하고 있는 것처럼 무서웠다. 이야기가 끝나는 순간에야, 저 야릇한 첫 문장이 얼마나 많은 것을 말하고 있는지 알게 됐다. 책장을 덮은 후엔 ‘넘버 원 팬’의 팬심을 생각해보게 됐다. 애니의 자리에 나를, 폴의 자리엔 가족, 연인, 친구, 동료 등을 통칭하는 누군가를, 팬심에는 사랑을 대입하자 이런 질문이 만들어졌다. 나는 누군가를 적절한 거리에서 사랑하고 있는가.

지금도 나는 누군가에게 팬심이 생기면 미저리의 첫 문장을 떠올린다. 팬심이 깊어지면 그때의 질문을 소환한다. 이미 차선을 넘은 것이 아닌지, 스스로 검증한다. ‘거리의 적절성’을 사랑하는 이와 사랑을 지키는 교통신호로 삼는 셈이다. 신호만 지킨다면, 내 안의 애니가 튀어나올 일은 없을 테니까.

#정유정#미저리#스티븐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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