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의 기억 속에 산다는 것[김민의 그림이 있는 하루]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0월 30일 11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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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바르 뭉크 ‘아픈 아이’

지난주 미국 뉴욕타임스(NYT)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처음으로 고발한 고(故) 김학순 여사(1924~1997)의 부고를 24년 만에 게재했다는 기사를 보셨나요?

국제부에서 일하며 매일매일 수많은 국제 뉴스를 접하게 되는데요, 이번 주 제 가슴을 가장 뜨겁게 만들었던 소식은 바로 이 기사였습니다. 김학순 여사의 용감한 첫 증언은 한국 역사뿐 아니라 세계 여성 인권사에서도 기억될 만한 사건일 것입니다. 비록 20여 년이 지났지만 잊지 않고 그녀의 삶을 기록한 NYT에도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김학순 여사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를 잊지 않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그 용기는 또 누군가에게 힘을 북돋워주고, 새로운 길을 열어 주며 끊임없이 생명력을 이어 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또 죽음이라는 슬픈 결말의 고통을 아름답게 승화시켜주는 길이겠지요.

이렇게 죽음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저는 노르웨이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 에드바르 뭉크(1863~1944)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뭉크의 ‘절규’는 20세기 전환기의 혼란스런 시대상을 고스란히 표현해 1000억 원 넘는 가격에 낙찰되기도 했지요. 오늘 이야기할 그림은 ‘절규’가 아니라 뭉크가 40여 년간 반복해 그렸던 그림, ‘아픈 아이’(The Sick Child)입니다.

누이의 죽음

1907년 뭉크가 그린 그림입니다. 그림의 왼쪽에는 붉은 머리에 창백한 얼굴을 한 여자 아이가 앉아 있습니다. 그녀의 뒤를 커다란 베개가 받치고 있고, 시선은 어두운 곳을 향하고 있습니다.

눈길을 사로잡는 건 이 여자 아이의 옆에 얼굴이 보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 여인은 아이의 손을 꼭 붙잡고 있지만, 고개를 떨군 채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두운 배경 속에 파묻힐 듯 여인의 형체는 거의 보이지 않고 푹 숙인 얼굴만이 흰 베개 위로 선명하게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뒤로 검푸른 선들이 아주 굵고 힘있게 그어 내려져 있습니다. 고개를 숙인 사람의 마음 속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처럼, 또 슬픔이 자아내는 분노가 담겨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표현입니다.

이 그림은 뭉크가 14살일 때 세상을 떠난 누이 요안느 소피(1862~1877)가 죽음을 앞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소피는 결핵을 앓다가 15살인 1877년 사망합니다. 같은 병으로 이들의 엄마도 9년 전 숨을 거두었는데 말이죠. 그래서 사진 속 오른쪽 고개를 숙인 여성은 소피의 엄마가 아닌 이모 카렌입니다. 세상을 떠난 엄마 대신 아버지와 카렌이 아이들을 돌보았다고 합니다.

에드바르 뭉크의 아버지는 군의관이었습니다. 개인 병원을 열려고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소박한 월급으로 생계를 이어가 뭉크의 가족들은 종종 가난에 시달렸습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아이들의 교육을 신경 썼고, 또 아이들이 심심해 할 때는 생생한 귀신 이야기를 해주거나 에드거 앨런 포의 책을 읽어주곤 했습니다.

하지만 에드바르 뭉크는 아버지의 종교적인 엄격함이 때때로 남매들을 짓눌렀다고 회고합니다. 여기에 어린 나이에 겪은 엄마와 누이의 죽음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 지도 다음의 말에서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종종 신경질적이며, 종교에 집착하는 정도가 병적일 때가 있었다. 나는 그로부터 정신병적인 증세를 물려 받았다. 공포와 슬픔, 죽음의 그림자는 내가 태어난 순간부터 늘 내 옆에 있었다.”

죽음을 40년간 반복해 그리다
뭉크가 소피의 죽음을 처음 그린 것은 1885년입니다. 이 때 그의 나이 26살이었죠.

첫 그림에서는 좀 더 사실적인 표현이 두드러집니다. 소피의 창백한 얼굴과 힘 없는 표정, 베개의 표현이 좀 더 자세하죠. 또 오른쪽 아래 물컵이나 왼쪽 서랍장도 좀 더 전통적인 방식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짙게 표현한 것이 무겁게 드리운 커튼이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는데요. 미술사가들은 이 어두운 커튼이 죽음을 상징한다고 보기도 했습니다.

이 때를 시작으로 뭉크는 그가 64살이 된 1927년까지 유화로만 6번에 걸쳐 소피의 죽음을 그립니다. 드라이포인트, 에칭 판화 작품도 8점이 있습니다. 남아있는 작품으로만 봐도 14가지 버전으로 이 주제를 그린 것입니다.

전통적인 표현으로 시작한 그림은 뭉크가 프랑스에서 고흐와 고갱의 작품을 보고 난 뒤에는 좀 더 과감한 색채와 터치로 변하며, 개인의 감정을 담아내는 표현주의 방식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물론 이런 표현 방식도 흥미롭지만, 제가 더 주목한 부분은 그가 고통스러운 기억을 끊임없이 되새김질 했다는 사실입니다. 40년에 걸쳐 그림을 반복해서 그렸다는 것은 결국 20대 시절부터 60대까지, 뭉크가 작품활동을 하는 시절 내내 이 장면을 잊지 않고 주기적으로 떠올렸다는 것이죠. 보통 아픈 기억을 우리는 멀리하고 잊고 싶어하는데, 그것을 정면으로 대면했다는 사실이 저에게는 놀랍게 다가 왔습니다.

뭉크에게 이 그림은 단순히 누이의 죽음만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엄마의 죽음도 있으며, 카렌 이모의 슬픔도 있습니다. 또 에드바르 뭉크 또한 어린 시절 폐결핵을 앓고 죽을 고비를 넘겨야만 했는데요.

뿐만 아니라 누이동생 로라는 어린 나이부터 정신 질환을 앓았으며, 남동생 안드레아스는 결혼 하고 몇 달 뒤 사망하고 맙니다. 즉 뭉크 자신과 가족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비극, 그리고 자신의 삶을 줄곧 따라다닌 죽음에 대한 공포, 그 모든 것이 이 한 장면의 그림에 담겨있다고 저는 느껴집니다. 만약 에드바르 뭉크가 이 고통들을 회피하고 외면하려고 했다면 그 역시 정신질환을 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에게 그림은 고통을 대면하고 자아를 붙들게 해주는 유일한 통로였던 셈이지요. 뭉크는 말년 이렇게 회고합니다.

“나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두 개의 적을 가지고 태어났다. 하나는 폐결핵이며 다른 하나는 정신병이다.”

고통을 대면하고 만들어진 돌파구
뭉크 자신도 ‘아픈 아이’ 그림이 예술 작업에서 돌파구가 되었다고 언급했습니다. 그는 “나는 처음에 인상주의 그림을 시작했지만, 내 요동치는 정신 상태를 표현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생각했다”며 “내 감정을 표현할 방법을 찾아야했고, 결국 ‘아픈 아이’를 그리면서 나는 인상주의와 결별하고 표현주의로 향해갈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 발언은 예술 사조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지만, 결국 그 자신 또한 인상주의라는 남의 이야기를 하다가 고통을 대면함으로써, 진정한 자신만의 이야기를 그릴 수 있었다는 말로 저에게는 들립니다. 어떠한 예술 작품이든 시대를 지나 불멸로 남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솔직하게 대면하고 만난 자아의 개별성 속에서 보편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결국 뭉크는 우울한 집 안에서 마주해야 했던 자신의 불안과 공포를 깊이 파고 들어가는 것을 통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그 감정을 표현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아픈 아이’에 끈질기게 집착한 결과 그가 ‘절규’라는 아이코닉한 작품도 만들 수 있었던 것이지요.

미술사를 돌아보면 결국 걸작을 만드는 것은 고통과 아픔이라는 사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런데 인생에서도 행복은 언제나 불행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고, 기쁨도 슬픔과 비교했을 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니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뭉크의 ‘아픈 아이’를 보면서, 나는 스스로를 똑바로 대면하고 있는지, 무언가 회피하기 위해 남에게 그 원인을 돌리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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