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란 前대법관 “평생 유일하게 계속한 일은 책읽기…밑줄 칠 연필 없으면 숨 막혀”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0월 31일 13시 34분


김영란 전 대법관.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김영란 전 대법관.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책을 읽을 때 줄을 칠 연필이 없으면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어쩔 수 없이 볼펜으로 줄을 치면 틀림없이 후회가 밀려오지요. 읽은 책을 다시 보면 다른 곳에 밑줄을 치고 싶을 때가 있는데 볼펜은 수정할 수가 없으니까요”

대법관이나 권익위원장의 타이틀이 아닌 김영란 전 대법관(65)의 모습은 영락없는 ‘독서광’이었다. 몸에 벤 특유의 독서 습관이 있다는 것부터 스마트폰이나 넷플릭스에 책 읽는 시간을 빼앗기는 데 슬픔을 느끼는 것까지 독서 애호가들의 마음과 꼭 닮아 있었다. 김 전 대법관은 21일 자신의 삶을 구성한 독서의 경험을 담은 에세이 ‘시절의 독서’(창비)를 펴냈다. 그를 28일 경기도 수원시 아주대학교에 있는 그의 연구실에서 만났다.

“알베르 카뮈(1913~1960)의 ‘이방인’을 초등학교 때 읽었어요. 제가 어린 시절에는 책이 귀해서 집집마다 책이 꽂혀 있지 않았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닥치는 대로 읽는 수밖에 없었답니다.”

김 전 대법관은 30년 가까이 한국사회의 최전선에서 법률가로 살아왔으면서도 평생 유일하게 계속해온 것이 책읽기뿐이라고 말할 정도로 열정적인 애독가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 집에 놀러 가도 책장에 꽂힌 세계문학전집을 읽느라 노는 것도 잊을 정도였다고 한다. 책에 대한 사랑은 판사 생활을 할 때도 사그라들지 않아 선후배들의 의아함을 자아낼 정도였다. 그는 “너는 판사인데 왜 소설을 읽느냐”는 동료 판사들이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마사 누스바움이 말하길 판사가 재판하는 건 독자가 소설을 읽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습니다. 재판 당사자들의 심정을 헤아리는 작업이 소설에서 펼쳐지는 상황을 이해하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기 때문이죠.”

이번 책에서 그는 영국 소설가 도리스 레싱(1919~2013)의 ‘금색공책’, ‘생존자의 회고록’ 등의 소설에서 사회를 바라보는 여성주의적 시선을 엿볼 수 있었다고 밝힌다. 프란츠 카프카(1883~1924)의 ‘성’은 관료주의 세계에 대한 암울한 예측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이전 세대의 문인이 남긴 글들 중 여전히 의미 있는 고전들에 대해 김 전 대법관은 “여러 작품 중에서도 보편적인 인간 삶의 단계를 호소하는 작품들이 생명이 긴 것 같다”고 말했다.

영상 매체와 인터넷이 스토리텔링과 정보 제공의 영역까지 모두 장악한 시대. 어린 시절엔 책을 읽다 잠에 드는 게 일상이었던 그 역시도 요새는 저녁에 스마트폰으로 메신저와 이메일을 확인하거나 드라마를 보는 날이 많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책이라는 매체만이 줄 수 있는 고유의 경험을 영원히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다른 세상에 가는 것과 같습니다. 영상 매체를 통해 남이 상상한 세계를 구경하는 것도 분명 즐거운 경험이지만 책을 통해 나만의 상상력을 펼쳐보는 것도 충분히 짜릿한 경험을 선사해 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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