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단 청소년극 ‘더 나은 숲’… 정체성 찾는 여정 그려
英 대가 연출로 국내 첫선
“좋은 청소년극, 어른에게도 수작… 억지로 작품에 교훈 넣어선 안돼”
부모를 잃고 쓰러진 아기 늑대. 이를 발견한 양(羊) 부부가 천적을 보고 도망치려던 것도 잠시. 평생 자식을 간절히 원했던 부부는 쓰러진 늑대를 자식으로 거두어 양부모(養父母)가 되기로 한다. 그리고 늑대에게 말한다. “넌 이제부터 양이야.”
양의 탈을 쓰고 자란 늑대의 삶은 어떨까. 지난달 29일 개막해 21일까지 서울 용산구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 ‘더 나은 숲’은 늑대 퍼디난드의 삶을 통해 정체성을 찾는 여정을 그렸다. 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 설립 10주년을 맞아 마련됐다.
독일 극작가 겸 소설가인 마틴 발트샤이트가 쓴 이 작품은 2010년 독일 청소년 연극상을 받으며 유럽 전역에서 20차례 이상 공연됐다. 국내 첫선을 보이는 무대는 영국 청소년극 분야 대가인 연출가 토니 그레이엄(70)의 손을 거쳤다.
1일 국립극단에서 만난 그레이엄 연출가는 “청소년극이 일반 연극이랑 다를 게 없죠?”라고 되물으며 “억지로 교훈적 메시지나 가르침을 담아선 안 된다. 청소년도 우리처럼 모든 걸 다 알고 느낀다. 그저 고민을 보여주면 된다”고 했다.
그레이엄은 “독일 작가가 쓴 작품을 영국 연출가가 한국에서 공연하는 상황”을 즐거워했다. “기생충, 오징어게임에서 한국 사회가 민감하게 다룬 불평등, 계층 문제가 세계에서도 통했어요. 좋은 연극도 여러 문화권에서 공통적으로 통해야 합니다. 한국 관객들이 제 작품 속 문제의식을 어떻게 바라볼지 기대됩니다.”
늑대, 양을 비롯해 곰, 여우 등을 인간 군상에 빗댄 작품은 많은 은유와 상징을 담고 있다. 동물처럼 행동하는 배우들을 보고 객석에선 웃음이 터져 나오지만, 이들의 고민은 꽤 묵직하다. 관객 각자 경험에 따라 극은 다르게 읽힌다. 그레이엄은 “누군가는 입양을, 다른 누군가는 이민자나 난민을 떠올릴 수 있다. 한국에선 외국인 노동자나 탈북자를 떠올릴 수 있겠다. 하지만 특정 집단이 아니라도 인간은 누구나 정체성을 고민한다”고 했다.
첫 공연을 포함해 9일 공연분까지 1차 판매한 티켓은 매진됐다. 청소년보다 성인 관객 비중이 더 높다. 팬데믹으로 청소년이 극장을 쉽게 찾지 못하는 점도 있겠으나 “좋은 청소년극은 어른에게도 좋은 극”이라는 그의 철학과도 맞아떨어진다. 그는 “작품을 평하기엔 이르다.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배우, 제작진이 노력할 뿐”이라고 했다.
결말은 열려 있다. 자신의 삶을 찾아 양부모 곁을 떠난 주인공이 더 행복한지, 불행한지 말하지 않는다. 퍼디난드와 함께 유년기를 보낸 양 친구들은 그가 늑대였다는 걸 뒤늦게 알아챈다. 그리고 객석에 반문한다. “왜 늑대가 양으로 살면 안 되느냐”고. 그레이엄은 “정해진 답은 없다. 다만 제목 ‘더 나은 숲’처럼 더 나은 곳이 있다는 희망은 청소년극에서 끝까지 놓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20대에 교직 생활을 하다 30대부터 연출가로 나선 그는 영국 국립청소년극단 유니콘 시어터에서 14년간 예술감독을 맡았다. 앞서 ‘타조 소년들’ ‘노란 달’을 국내에 선보여 호평받기도 했다. 교훈과 가르침을 최대한 덜어내려 했던 이번 작품에서도 여러 배우들은 핵심을 관통하는 ‘교훈적’ 대사를 말한다. “당신이 어디서 왔는지는 중요치 않습니다. 중요한 건 어디로, 누구와 함께 가느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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