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싣느냐, 마느냐.’ 한동안 관계자들이 고민에 빠졌습니다. 골치를 썩인 곳은 동아일보 편집국이었죠. 그 대상은 축전 하나였습니다. 1926년 3월 1일 소련 국제농민회 본부에서 보냈죠. ‘이 위대한 날의 기념을 영원히 조선의 농민에게’라며 ‘그들의 역사적인 국민적 의무를 일깨울 것을 믿으며 자유를 위하여 죽은 이에게 영원한 영광이 있을지어다’라고 적었습니다. 3‧1운동 7주년을 맞아 조선 농민들을 격려하며 위로하는, 연대 의지를 담았죠. 하지만 편집국의 적지 않은 이들은 축전을 옮겨 싣기를 꺼려했습니다. 그 전 해 부임한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 미야마쓰의 언론정책이 강경했기 때문이었죠. 섣불리 축전을 실었다가 뜻밖의 타격을 받을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있었습니다.
주필 송진우가 결단을 내렸습니다. ‘우리가 신문을 발행하게 된 것은 영리를 꾀하자는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의 한 수단이기 때문이 아니었소. 그렇다면 해답은 자명하오.’ 그의 결론이었죠. 송진우는 국경지방의 독립군을 ‘불령선인단(不逞鮮人團)’으로 표기하라는 총독부에 맞서 ‘독립단’으로 쓰겠다고 몇 달을 승강이한 적도 있습니다. 총독부 지시를 고분고분 따르면 신문은 존재이유를 잃는다고 판단했죠. 결국 ‘○○단’으로 쓰게 됐습니다. 하지만 이번은 사정이 또 달랐습니다. 축전 주제가 3‧1운동이기 때문이었죠. 일제는 매년 3‧1운동이 일어난 즈음이 되면 유난히 신경을 곤두세웠습니다. 혹시 우리 민족을 선동해 또 ‘소요’를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불안이 많았죠.
아니나 다를까, 총독부는 축전을 실은 3월 5일자 신문을 발매금지했습니다. 하루가 지난 뒤 무기한 발행정지까지 추가했죠. 이후 45일간 신문을 내지 못했습니다. 2면의 2단 크기 기사에 내린 처벌치고는 무지막지했죠. 총독부는 한 술 더 떠 고등계 형사 5, 6명을 보내 편집국을 뒤져 축전 원문을 압수했습니다. 주필 송진우와 발행인 겸 편집인 김철중, 기자 고영한 등을 여러 번 불러 조사했고요. 결국 송진우를 보안법 위반으로, 김철중을 신문지법 위반으로 재판에 넘겼습니다. 구속을 면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을까요? 송진우는 법정에서 ‘전보가 3월 4일 오전 10시 경에 나의 손으로 들어왔기에 나는 아무에게도 협의하지 않고 즉시 번역을 시켜서 신문에 게재하게 하였다’라며 모든 책임을 떠안았습니다.
검사는 ‘해외에 조선독립을 원조하는 유력한 단체가 있음을 알려서 (독립)사상을 선동하려 함이 분명하니 사회를 문란하게 하는 것’이라며 준엄하게 꾸짖었습니다. 송진우는 징역형 6개월, 김철중은 금고형 4개월이 확정됐죠. 동아일보가 당한 최초의 체형(體刑)이었습니다. 그래도 동아일보의 저항정신은 수그러들지 않았죠. 이들의 재판이 진행되던 8월 22일자 1면에 논설기자 최원순이 횡설수설을 실었습니다. ‘주의자는 검거, 언론기관은 정지 아니면 금지, 집회와 단체는 위압, 그래도 간판만은 문화정치’라고 비꼬았고 ‘총독정치는 조선인을 이롭게 하는 인사는 박해하고 조선인을 해하는 놈들은 절대적으로 보호하는 악당보호정치’라고 직격탄을 날렸죠. 최원순은 징역형 8개월을 받았습니다.
송진우는 1926년 11월부터 수감생활을 시작하면서 한 가지 더 타격을 입었습니다. 그 무렵 설립 준비에 한창이던 좌우합작단체 ‘신간회’에 참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죠. 송진우는 1922년부터 민족적 중심세력을 형성해야 한다고 제안했고 민족적 조직과 단결의 필요성도 부르짖었습니다. 이런 그가 합법적인 민족적 중심단체 성격의 신간회에 함께 하지 못한 것은 자유를 빼앗기는 감옥생활보다 더 속상했을 법합니다. 독립 구상을 실현하는데 큰 걸림돌이 됐으니까요. 다만 그가 수감되기 전 기자단체 ‘무명회’가 마련한 저녁자리에서 떠나는 사람과 남은 사람들 사이에 깊은 감회를 나눈 일이 작은 위안이 됐을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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