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내한무대 프로듀서 타계
올해는 아들이 17일부터 공연
“2005년 첫 공연 열기 못잊어”
유럽 인구 절반을 앗아간 페스트와 지난한 백년전쟁을 겪은 15세기 프랑스 파리. 재해와 전쟁 속에서 살아남은 인류는 잿더미 위에서 희망을 노래한다. 다가올 천년엔 더 나은 삶과 사랑이 가득하리라 믿으며.
새 시대에 대한 기대와 불안을 담고 있는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의 인기 넘버 ‘대성당의 시대’. 시적인 노랫말과 중독적 선율로 1998년 첫 공연 이래 23개국 1500만 명 관객 앞에서 불리던 이 노래가 17일부터 다음달 5일까지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울려 퍼진다. 지난해 11월부터 올 1월까지 했던 공연이 다시 찾아오는 것. 17일 공연에 앞서 13일 경기 구리아트홀 코스모스 대극장서 관객과 만나며, 서울 공연 이후엔 대구, 부산을 거친다. 약 두 달간의 한국 투어다.
지난해 이 작품의 프로듀서 샤를 탈라르가 타계한 뒤 ‘노트르담 드 파리’ 사단을 이끄는 이는 프로듀서이자 그의 아들인 니콜라 탈라르(48). 2000년 프로덕션에 합류해 유럽, 미국, 아시아로 작품을 진출시킨 일등공신이다. 미국 브로드웨이 한복판에서 이례적으로 프랑스어 공연이 이어질 만큼 원어의 맛을 잘 살려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8일 서울 광화문 인근에서 만난 그는 “2005년 한국 첫 공연 당시 ‘내가 비틀스를 데려왔나’ 싶을 정도로 환호가 대단했다”며 “지난해는 팬데믹으로 객석의 함성은 들을 수 없었지만 마스크 너머로도 환호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또 “현장에서 관객의 반응을 느끼지 못하더라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관객들이 올려주는 반응을 계속 챙겨보고 있다. 다른 방식으로 관객들의 응원을 느낀다”고 했다.
올해 공연에도 최고 베테랑 배우들이 출연한다. 1998년 초연부터 참여한 원조 ‘프롤로’ 다니엘 라부아를 비롯해 음유시인 ‘그랭구아르’ 역의 리샤르 샤레스트, 대성당 종지기 ‘콰지모도’ 역의 안젤로 델 베키오 등이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예술가들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예술을 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면 된다”는 철학을 배웠다. 지금도 기라성 같은 예술가들과 함께 할 때 이 철칙만큼은 잊지 않는다. 무엇보다 “올해 저와 배우들이 공연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모두 한마음이다. 감격스럽고 무대가 소중하다”고 했다.
1998년 초연 이래 무대에 숱하게 작품이 올랐고, 국가별 여러 언어 버전의 공연도 제작됐다. 하지만 ‘노트르담 드 파리’의 원작은 크게 흔들리지 않기로 유명하다. 니콜라 탈라르는 “시간이 흘러도 원작에 크게 손을 대지 않는 게 원칙이다. 시대를 관통하는 불멸의 감정인 ‘사랑’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울림을 주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극이 담고 있는 시의성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했다. “25년이 지났지만 극에 담긴 사회 투쟁적 이슈는 지금도 해결되지 않았어요. 극을 처음 선보인 1998년 프랑스에서도 불법 체류자. 이민자 문제가 있었죠. 지금도 프랑스뿐 아니라 세계 나라서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잖아요.”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던 그는 아버지 손에 이끌려 공연계로 뛰어들어 ‘가업’을 이어받았다. 그의 아버지 샤를 탈라르는 프랑스 문화계 저명인사다. 1970년대부터 2000년대 프랑스를 대표하는 독립 음악 프로듀서 중 한 명으로 공로를 인정받아 국가 훈장도 받았다. 또 1973년 프랑스 파리를 연고로 하는 프로 축구단 파리 생제르맹(PSG)을 재건하는 데 참여했다. 1996년부터는 본격적으로 ‘노트르담 드 파리’ 제작에 집중했으며 ‘태양의 아이들’ ‘돈 주앙’ 등 작품을 남겼다.
니콜라 탈라르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일을 보고 자랐기 때문에 일종의 ‘내부자’의 관점에서 문화계와 공연을 지켜볼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좋은 공연’에 대해 “정답은 없다”고고 단언했다. 이야기, 특수효과, 안무 등 표현수단이 다양해지면서 관객의 감정을 흔들 수 있는 좋은 공연의 요소도 다양해졌다는 것.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관객이 근심 걱정을 완전히 잊고 러닝타임 내내 감정을 풍부하게 느끼고 몰입할 수 있는 작품인지 늘 돌아본다”고 했다.
작품의 총괄 책임자가 된 그는 한국 첫 공연 당시 객석의 독특하면서도 열광적 반응을 잊지 못한다.
“2005년 첫 공연 때 ‘우리가 뭘 잘못하고 있나’ 싶을 정도로 극이 끝날 때까지 정적만 흘렀어요. 하지만 커튼콜 때 모든 감정이 폭발하며 기립박수를 받았죠. ‘제2의 고향’ 한국의 관객과 다시 만날 순간을 기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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