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예산의 한적한 시골에 있는 토종씨앗박물관에 방문했을 때 두 개의 종지에 삶은 통밀이 나왔다. 육안으로는 한 종지의 통밀이 좀 더 매끈한 듯 보였지만 미세한 차이를 금방 찾아내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다 통밀 몇 알을 먹어보았다. 한국인들은 현미 흑미 보리 등 통곡물을 자주 접하기에 씹어보면 두 통밀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첫 번째 종지에 담긴 통밀은 더 매끄럽고 익숙한 맛, 다른 종지의 것은 뒷맛의 구수함이 길었다. 알고 보니 첫 번째가 수입 통밀, 두 번째가 국내 종자인 앉은뱅이 통밀이었다. 우리 통밀은 특유의 고소한 맛과 더불어 씹는 질감이 강하게 느껴졌다. 점차 소멸하는 품종과 전통 음식문화를 보존하기 위한 ‘맛의 방주(Ark of Taste)’에 앉은뱅이 통밀이 등록돼 있다. 통밀 블라인드 테이스트 후 우리 종자의 매력에 빠져 토종 통밀을 리소토 등 다양한 동서양 음식에 적용해 봤다.
얼마 전 울릉도에 갈 기회가 있었다. 한없이 빠져들 것 같은 망망대해와 깃대봉에서 바라보는 울릉도의 멋진 산야는 고된 뱃길마저 감사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항구 근처의 혼잡한 식당들과 가성비 떨어지는 식단을 접했을 땐 실망했다. 그러다 성인봉 북쪽으로 칼데라 화구가 함몰돼 만들어진 나리분지 마을에 갔을 때 울릉도의 참속살을 만났다. 꼬불꼬불 산길을 넘는 곡예 운전을 한참 해야 나오는 이곳은 울릉도에서 유일한 평지 마을이다.
성인봉과 깃대봉을 다녀온 등산객들이 많이 찾는 나리마을의 ‘산마을식당’은 20여 년 된 지역 맛집이다. 울릉도에서 오랫동안 농사를 지은 한귀숙 사장은 어릴 적부터 먹은 나물 위주로 밥상을 차려낸다. 엉개(엄나무순)나물, 섬쑥부쟁이(부지깽이)나물, 미역취나물, 더덕무침, 명이나물지, 독활(땅두릅)삼나물무침, 고비나물 등이 계절과 섬 나물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슬로 푸드 가치에 눈을 뜬 한 사장은 지역 토종 종자를 보존하기 위해 직접 재배에 나섰다. 그리고 식당 메뉴로 만들어 울릉도 ‘맛의 방주’ 홍보대사를 자처하게 됐다.
이곳 밥상에는 여러 산채와 해산물은 물론 불그레한 고구마처럼 생긴 홍감자와 엉겅퀴로 만든 국과 나물도 자주 등장한다. 거칠거칠한 질감의 울릉도 돌김, 손꽁치, 칡소 불고기, 섬말나리 범벅 등 최소 세 가지 이상의 울릉도 특산품이 계절에 따라 오른다. 한 사장은 4년 전부터 울릉도 슬로 푸드 회장을 지내며 울릉도 특산품 보급에 앞장서고 있다. 나리마을에 가면 사라질 것 같은 토종 특산품에 대한 뜨거운 보존 열정을 느낄 수 있다. 씨껍데기막걸리에 고기가 아닌 삼나물 한 점이 더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알고 갈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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