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의 마지막 임금 순종이 숨을 거뒀습니다. 1926년 4월 25일이었죠. 1907년 대한제국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나 불과 3년 뒤 쫓겨나야 했던 비운의 왕이었습니다. 아버지인 고종 때 사실상 나라를 빼앗긴 상태였지만 공식적인 국권 상실은 순종 때 일어났죠. ‘융희 황제’에서 ‘창덕궁 이왕(李王)’으로 추락한 채로 외로움과 그리움 속에서 지낸 세월만 16년이었습니다. 민중은 순종의 죽음으로 조선왕조가 끝났다는 사실을 한 번 더 절감했을 법합니다. 10여만 명의 남녀노소가 돈화문 앞으로 몰려와 통곡하고 상점은 문을 닫고 기생들까지 영업을 삼가는 모습에서 이 정서를 엿볼 수 있습니다. 임종했던 옛 신하 민영찬은 ‘(승하하실 때) 아무런 말씀이 계시지 못하였습니다’라고 전할 뿐이었죠.
이제 장례가 발등의 불이 됐습니다. 일본 내각은 군소리 없이 국장(國葬)으로 치른다고 결정했죠. 장례일은 왕가의 희망대로 6월 10일로 정했고요. 이참에 1904년 먼저 세상을 떠난 순명효황후의 묘를 옮겨와 경기도 금곡에 함께 안장하기로 했습니다. 일제는 순종의 장례를 적극 지원했습니다. 그런데 일제가 그에 못지않게 신경을 곤두세운 일이 있었죠. 바로 경계활동이었습니다. 순종의 병세가 회복될 가망이 없던 때부터 고등계 형사들은 물론 정사복 순사들을 총출동시켰습니다. 불면불휴(不眠不休) 즉 잠을 자지도, 쉬지도 않으면서 혹시나 불온한 움직임이 없나 눈에 불을 켜고 지켜봤죠. 유언비어를 퍼뜨리거나 혹세무민하면 용서 없이 처벌하겠다고 엄포도 놓았습니다.
드디어 장례행렬이 창덕궁을 출발해 오전 8시 반쯤 종로 3가 단성사 앞을 지나갔습니다. 갑자기 ‘조선독립만세’ 함성이 터지고 격문(檄文)이 공중에 흩날렸죠. 중앙고등보통학교 학생 30, 40명이 앞장선 6‧10만세운동의 첫 거사였죠. 순종의 영구가 장례식장인 동대문 밖 훈련원으로 갈 때 근처 8곳에서 ‘조선독립만세’가 메아리쳤습니다. 순종의 마지막 길을 지켜보러 나온 수십만의 사람들이 순식간에 가세했죠. 동아일보가 사설을 통해 여행 단속, 여관 수색, 신분 조사, 무조건 검속을 자행한다고 비판할 정도로 철통같았던 일제의 경계망이 뚫린 순간이었습니다. 당황한 나머지 정사복 경찰은 물론 기마경찰까지 군중 속으로 뛰어들어 학생들을 붙잡느라 허둥댔죠. 그 바람에 부상자들이 속출했습니다.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학생들은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통동계(通洞系)로 나뉩니다. 이중 통동, 현재 통인동에 모여 살던 학생들이 뿌린 격문에는 ‘조선민족아, 우리의 철천지원수는 자본제국주의 일본이다, 2천만 동포야, 죽엄을 결단코 싸우자, 만세! 만세!, 조선독립만세!’라고 적혀 있고 ‘조선민족대표 김성수 최남선 최린’의 이름이 들어 있었죠. 이 세 사람이 학생들에게 3‧1운동 때처럼 민족지도자로 각인돼 있었던 셈이죠. 원래 2차 조선공산당과 천도교가 손을 맞잡고 거족적인 6‧10만세운동을 구상했지만 6월 7일 발각되는 바람에 무산됐습니다. 제2의 3‧1운동은 불발로 끝났지만 학생들은 밤새 격문을 찍어낸 뒤 용케 일제의 감시를 피해 경성에서나마 독립만세를 외치는데 성공했습니다.
장례기간 내내 순종을 ‘순종효황제’로 표기한 동아일보는 장례식 이모저모를 필름에 담아 한 시간 분량의 영화로 만들었죠. 6월 15일부터 경성 대구 함흥에서 상영했습니다. 순종을 떠나보낸 민족의 슬픔을 승화시켜 새로운 길을 개척하자는 뜻이었습니다. 볼거리가 드물던 시절이기도 했지만 상영관은 인파로 미어터질 지경이었죠. 2회 상영을 즉석에서 3회로 늘렸지만 허탕 친 이들이 더 많았습니다. 상영 장소도 안성, 연일(延日), 평양으로 늘렸고 이어 전국을 순회할 계획이었죠. 하지만 예상 밖의 인파가 몰리자 총독부가 끼어들었습니다. 사전 검열해 놓고도 더 이상 상영하지 말라고 압력을 넣었죠. 일제는 그마저도 불안했던지 8월부터 활동사진검열규칙을 시행해 영화 내용까지 입맛대로 재단했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