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관서 ‘박수근 회고전’]
박수근미술관-소장자 협조로 역대 최다 작품 163점 선보여
유화 7점-삽화 12점 첫 공개
생계 위해 삽화-표지화 그리고 판화-프로타주 등 작업하며
단순성-흑백대비 양식 다듬어
1961년 박수근은 일본에서 열린 국제자유미술전에 ‘나무’를 출품했다. 그런데 작품을 도둑맞았다고 연락이 왔다. 부인 김복순은 “경찰에 신고하자”고 했지만 박수근은 만류한다. “돈은 없고 그림은 탐이 나서 가져갔을 텐데, 작품이 도난당한다는 것은 영광”이라며. 그리고 이듬해 한국에서 열리는 국제자유미술전을 위해 ‘나무와 두 여인’을 다시 제작한다. 이 일화는 박수근의 성품을 잘 보여준다. 자신이 가난했기에 남의 가난을 알았던 화가. 답답할 정도로 선한 화가. 한데 그는 마냥 불운하고 여린 화가였을까. 11일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개막한 ‘박수근: 봄을 기다리는 나목’은 박수근(1914∼1965)의 삶을 따라가며 그의 진면목을 살펴본다. 국립현대미술관 개관 후 처음 선보이는 박수근 개인전으로, 양구군립 박수근미술관과 유족 연구자 소장자의 협조로 열린 대규모 회고전이기도 하다. 유화 수채화 드로잉 삽화 등 모두 163점으로 역대 최다인 데다 이 가운데 유화 7점과 삽화 12점은 국내에 처음 선보인다.
박수근의 초기작과 수집품이 포함된 전시 1부는 그의 주체적인 면면을 보여준다. 박수근은 부친의 사업 실패로 보통학교 졸업 후 독학으로 화가의 길을 걸었다. 12세 무렵 책에서 본 밀레의 ‘만종’에 감동한 박수근은 직접 ‘밀레 화집’을 만들었다. 빈센트 반 고흐, 파블로 피카소와 같은 서양화가의 화집도 수집했다. ‘철쭉’(1933년), ‘겨울 풍경’(1934년) 등 초기작을 보면 인상주의 화풍을 시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생계를 위해 삽화나 표지화도 그렸다. 펜화, 판화, 프로타주(물감을 화면에 비벼 문지르는 채색법) 등 다양한 작업을 하면서도 그를 대변하는 단순성, 흑백 대비와 같은 회화 양식을 다듬어갔다.
결실을 맺은 건 1953년부터 1963년까지다. 박수근이 서울 종로구 창신동에서 살던 10년간이다. 1940년 평양에서 결혼한 박수근은 6·25전쟁이 터지자 남한으로 내려왔고, 2년 뒤인 1952년에야 가족을 다시 만나게 된다. 그는 미군 영내매점(PX)에서 초상화가로 일하며 돈을 모아 1953년 창신동 집을 마련한다. 1953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집’(1953년)으로 특선을 수상하며 이름을 알린 그는 주요 전람회에 참여하며 주목받는다.
이 기간을 아우르는 전시 2부와 3부에서는 그의 대표작을 감상할 수 있다. ‘집’, ‘길가에서’(1954년), ‘쉬고 있는 여인’(1959년), ‘소와 유동’(1962년), ‘악’(1963년), ‘할아버지와 손자’(1964년)는 전람회 출품작이라 크기가 큰 데다 구도가 매우 안정적이다. 국내에 처음 선보이는 ‘노인들의 대화’(1962년) ‘소녀’(1950년대 후반)는 그가 창신동 집 앞에서 볼 법한 풍경을 유추할 수 있다. 이 무렵 한국에 체류하던 외국인들도 박수근에게 관심을 보였다. ‘노인들의 대화’는 당시 미국 미시간대 교수인 조지프 리가 1962년 대학원생들과 함께 방한했을 때 구입한 것이다.
외국인에게 인기를 얻은 그는 미국 개인전을 추진했지만 급작스럽게 건강이 악화돼 1965년 타계한다. 4부에 전시된 후기작을 찬찬히 살펴보면 그의 특징으로 여겨지는 회백색뿐 아니라 1950년대 중반부터 파스텔 톤을 과감히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김예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박수근의 그림에는 4∼22겹의 물감이 겹쳐져 있어 자세히 보면 그림 안에 굴곡이 있을 정도”라고 했다. 내년 3월 1일까지.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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