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경찰부에서 경성 종로경찰서로 협조요청이 왔습니다. 일본 오사카에서 적발된 대규모 중국 지폐 위조사건 용의자 3명이 경성에 잠입했으니 잡아달라고 했죠. 종로서 경찰이 종로구 도렴동의 한 주택을 덮쳤습니다. 용의자 1명을 붙잡고 숨겨둔 위조지폐도 찾아냈죠. 그런데 경찰은 재떨이에 구겨진 채 있던 삐라(전단) 한 장을 놓치지 않았죠. 1926년 6월 5일이었으니 순종 인산일을 앞두고 경찰이 최고로 긴장돼 있었던 때였죠. 삐라를 펼쳐본 형사는 깜짝 놀랐습니다.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이를 위해 싸우자는 본문 아래에 ‘혁명적 민족운동자 단결 만세!’ ‘대한 독립 만세’ 구호가 선명했거든요. 곧바로 비상이 걸렸습니다. 붙잡아온 용의자를 혹독하게 몰아쳐 삐라가 나온 곳을 캐물었죠.
위폐범은 양말제조업자 이름을, 양말제조업자는 천도교 신자 부부의 이름을 댔죠. 부인의 자백으로 경운동 천도교 본부가 떠올랐고요. 경기도 경찰부와 종로서가 합동으로 본부를 급습해 그 안에 있던 손재기의 집을 뒤졌습니다. 손재기는 천도교 제3세 교주 손병희의 종손이죠. 그 집에서 5종류, 5만 장이 넘는 전단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때만 해도 일제 경찰은 3‧1운동을 주도했던 천도교가 제2의 만세운동을 일으키려 하는구나, 생각했죠. 그러나 고등계가 취조의 고삐를 바짝 조이자 뜻밖의 이름이 흘러나왔습니다. 권오설, 그가 전단 내용과 제작비를 건넸다고 했죠. 권오설은 전해인 1925년 11월 제1차 조선공산당 적발 때 지하로 숨어 7개월째 암약 중이었죠. 이번엔 권오설 체포까지 3일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신의주 회식사건’으로 꼬리가 밟혀 타격을 받았던 조선공산당은 1925년 12월 즉시 조직 재건에 나섰습니다. 강달영을 책임비서로 5인 중앙집행위원회를 구성했죠. 권오설은 이듬해 3월 중앙집행위원회에 보선되면서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를 겸했죠. 제2차 조선공산당으로 불립니다. 이 시기 조선공산당은 ‘임시상하이부’를 지휘하며 세력 확대에 나섰습니다. 임시상하이부에는 일제의 검거를 피해 달아난 1차 조선공산당 간부들이 있었지만 상하관계를 분명히 했죠. 국내 조직도 확충했고 코민테른(공산주의 인터내셔널)으로부터 조선지부로 승인을 얻기도 했습니다. 정통성을 인정받은 것이죠. 무엇보다 1차 때에 비해 운동의 통일을 위해 유연한 태도를 보였던 점이 두드러졌습니다.
소설 ‘상록수’의 작가 심훈을 아시죠? 심훈이 이런 시를 썼습니다. ‘이게 자네의 얼굴인가?/여보게 박군, 이게 정말 자네의 얼굴인가?/알코올 병에 담가놓은 죽은 사람의 얼굴처럼/…’ 여기서 박군은 박헌영입니다. 1927년 병보석으로 풀려난 박헌영의 얼굴을 본 심훈의 마음이 담겼죠. 심훈은 박헌영, 무정부주의자 박열과 경성고등보통학교 동창이었죠. 일제는 조선공산당 뿌리를 뽑으려고 가혹한 고문을 저질렀습니다. 박순병과 박길양이 조사 도중에, 백광흠이 고문 후유증으로, 권오상은 병보석 후, 권오설은 감옥에서 숨졌습니다. 자백이 유일한 증거이다시피 한 상황에서 일제가 줄잡아 3000명을 붙잡아 이렇게 다뤘으니 2차 조선공산당은 풍비박산 났죠. 기자의 접근과 언론 보도는 철저하게 차단당했습니다.
앞서 2차 조선공산당은 3차 중앙집행위원회에서 ‘민족, 사회 양 운동자를 통일하는 국민당’을 조직하기로 결의했죠. 손을 맞잡을 민족주의 파트너는 천도교 구파였고요. 강달영과 이종린 두 사람의 신뢰와 친분도 밑거름이었죠. 1926년 4월 순종의 승하는 조선공산당이 국민당 논의를 잠깐 뒤로 하고 만세운동을 펼칠 계기를 제공했습니다. 조선공산당은 ‘대한독립당’ 간판을 앞세워 사회주의자 민족주의자 천도교 청년 학생 등을 모아나갔죠. ‘민족해방이 곧 계급해방’이라는 구호가 2차 조선공산당의 지향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비록 중국 위조지폐 탓에 6‧10만세운동은 경성에서 일어나는데 그쳤지만 통일‧단결의 흐름은 국외의 민족유일당 운동과 국내 신간회 성립의 든든한 토대가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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