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그니에슈카 홀란트 감독의 영화 ‘토탈 이클립스’(1995년)는 시인 랭보와 베를렌의 이야기를 그렸다. 영화는 베를렌이 독주 압생트를 마시는 처음과 끝 장면 사이에 그들의 과거 추억을 배치한다. 베를렌은 랭보가 죽었다는 소식에 함께 즐기던 압생트를 홀로 마시며 랭보를 생각한다. 영화처럼 조선 후기 문인 최성대(崔成大·1691∼1762)도 술을 마시며 친구 신유한(申維翰·1681∼1752)을 떠올렸다.
신유한은 시인보다 열 살 위였고 세상도 10년 먼저 떴다. 최성대는 이름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자신의 시를 남에게 보여주려 하지 않았다. 그런 시인을 먼저 알아보고 인정해준 이가 후일 일본에까지 문명(文名)을 날리게 된 신유한이었다. 시인은 신유한이 세상을 떠난 뒤 술자리에서 그가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영화 속 베를렌이 녹색의 압생트를 마시며 랭보를 떠올렸던 것처럼 시인도 왁자지껄 떠들썩한 자리에서 녹색의 술을 앞에 두고 신유한을 떠올렸던 듯하다.
친구에 대한 그리움은 결코 그때만이 아니었다. 시인은 연작시에서 눈 내리는 겨울에도, 앵두꽃 피는 봄에도, 나비 날고 꾀꼬리 우는 여름에도, 기러기 떠나가는 가을에도 친구가 그립다고 토로했다. 어느 곳(‘何處’)에 있든 바로 이 순간(‘此時’) 친구가 너무나 보고 싶었다.
영화에서 베를렌과 랭보의 문학적 동반이 우정을 넘어 사랑으로 이어졌다면, 최성대와 신유한의 관계는 부부 같다는 평가를 받았다. 둘이 한 방에서 정담으로 밤을 지새우자 주인집 노파가 여자를 숨겨 놓았나 의심하기도 했다.(‘희贈申秘書’) 다만 전생에 신유한이 남편이고 최성대가 부인이었을 것이란 세평은 시인의 시가 신유한과 견주어 여성적 풍격을 띠기 때문이기도 했다.
임종 무렵 시인은 “풍진 세상 잘못 태어나 불우하기 그지없어, 외로운 배 언제나 거센 파도 두려웠지.(誤出風塵百不遭, 孤檣常파惡波濤.)”(‘絶筆’)라고 자신의 삶을 회고했다. 한나라 양웅(揚雄)은 저술이 이해받지 못하자, 먼 훗날 자신과 같은 이가 나와 이해해주길 소망한 바 있다. 시인에게 신유한은 또 다른 나처럼 자신의 시를 진정으로 이해해준 벗이었다.(李壽鳳·‘杜機詩集序’) 세상의 거센 파도를 함께 견디며 외로움을 위로해준 동반자였다. ‘어디서 그대 사무치게 그리울까’로 시작되는 연작시를 읊조리며 진정으로 날 이해해준 그 친구를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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