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단’ 하면 흔히 ‘3박스형’ 떠올리지만… 초창기엔 해치백 형태도 포괄한 개념
시대-언어권별 가리키는 말 각양각색
소비자 성향 변해 SUV 인기 높아져도… 車제조사들 여전히 세단에 더 공들여
‘고급’ ‘럭셔리’ 이미지는 여전히 ‘불변’
롤스로이스모터카가 최근 우리나라에 ‘고스트 블랙 배지’를 아시아 처음으로 공개했다. 고스트 블랙 배지는 지난해 나온 신형 세단인 고스트를 좀 더 특별하게 꾸민 모델로, 고성능 모델의 역할도 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보다 조금 앞선 5월에는 벤틀리도 세대 교체한 플라잉 스퍼를 국내에 판매하기 시작했다. 새 플라잉 스퍼는 최상위 모델이었던 뮬산(뮐산)의 단종으로 브랜드 최상위 세단의 자리를 넘겨받았다. 그래서 이전보다 한층 더 호화로운 모습과 꾸밈새를 갖췄다.
이러한 사례들은 럭셔리 승용차의 중심이 여전히 세단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요즘은 소비자들의 성향 변화로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이 큰 인기를 얻고 있어 전통적으로 SUV와는 거리가 멀었던 스포츠카 전문 브랜드나 럭셔리 승용차 브랜드까지도 SUV를 내놓을 정도다. 그러나 럭셔리 승용차 브랜드들은 시장 영역을 넓히기 위해 SUV를 내놓는 것과는 별개로 여전히 세단에 더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세단은 승용차 장르 가운데 역사가 가장 긴 차종은 아니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통념과 반대되는 흥미로운 사실들이 많다. 오늘 Q에서는 한 세기에 걸쳐 큰 변화를 겪어 온 세단의 역사와 이모저모를 소개한다.
세단이라는 표현 자체는 17세기 영국에서 쓰인 세단 체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정설처럼 여겨진다. 세단 체어는 우리나라의 옛 가마와 모습이 비슷한 이동수단이었다. 바닥에 의자를 놔 사람이 탈 수 있게 하고, 창이 나 있는 벽으로 사방을 둘렀다. 또 앞뒤에 손잡이가 있어 두 사람이 들고 나르도록 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형태의 이동수단이 프랑스 북동부 스당(sedan) 지역에서 많이 쓰였고, 영국으로 유행이 번져 자리를 잡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많다. 스페인어에서 세단이라는 말이 생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의자를 뜻하는 스페인어 시야(silla)와 이탈리아어 세디아(sedia) 같은 말이 대부분 ‘앉는다’는 뜻이 있는 고전 라틴어 어근인 세드(sed)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것이 그 근거다.
기원이야 어떻든 현대적 개념의 세단은 대개 엔진이 들어있는 엔진룸, 사람이 타는 탑승 공간, 짐을 싣는 적재 공간, 즉 트렁크가 각각 칸막이로 구분되어 있는 차를 말한다. 차의 겉모습을 옆에서 봤을 때 각 부분이 세 개의 상자를 이어붙인 듯한 모습이어서 ‘3박스 스타일’이라고도 한다.
다만 세단이 처음부터 우리가 아는 3박스 스타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세단이 자동차 형태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 기록이 남아있는 첫 사례는 191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자동차 브랜드인 스튜드베이커가 새 모델을 내놓으며 당시 흔한 자동차 형태와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세단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런데 당시에는 차체 뒤쪽에 적재 공간을 갖춘 차가 거의 없었다. 요즘의 3박스 스타일을 포함하는 개념의 세단은 아니었던 셈이다.
우리가 흔히 세단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3박스 스타일 세단은 다른 말로 노치백(notchback) 세단이라고 한다. 그와는 달리 세단의 꽁무니를 잘라낸 듯 차체 뒤쪽이 뭉툭한 차를 가리켜 흔히 해치백(hatchback)이라고 하는데, 이는 해치백 세단의 줄임말로 노치백 세단과 구분하기 위해 쓰인 상대적 표현에서 비롯됐다.
무엇보다도 세단 형태의 차를 가리키는 이름은 지역과 언어권마다 다르다. 첫 기록이 미국에서 등장했던 데에서도 알 수 있듯, 세단은 주로 미국과 미국의 영향력이 미친 지역에서 장르 이름으로 자리를 잡았다. 영국에서는 자동차 역사 초기에 브루엄(Brougham)으로 불렸지만 나중에 설룬(Saloon)이라는 표현이 대세가 되었다. 브루엄이라는 표현은 원래 마차의 한 종류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마부는 외부에 노출된 앞자리에 앉아 말을 몰고, 탑승자는 지붕과 창이 있는 탑승 공간에 타는 형태의 것이었다.
브루엄 형태의 자동차는 오래지 않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지만, 그 이름만은 더 오래 살아남았다. 구조적 특징에서도 알 수 있듯, 브루엄 형태의 마차는 사회적 계급이 존재하던 시절에 상당한 권위가 있는 사람들이 주로 타곤 했다. 이름에서부터 고급스럽고 권위적인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에 브루엄이라는 이름은 럭셔리 자동차 브랜드들이 특정 모델의 고급 버전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애용했다. 프랑스에서는 베를린(Berline), 이탈리아어와 스페인어, 포르투갈어권 지역에서는 베를리나(Berlina), 독일에서는 리무지네(Limousine)라고 부른다. 다만 남미 등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는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를 쓰면서도 차 장르는 세단이라고 표현한다.
자동차 역사 초기의 세단에서는 우리가 세단에서 흔히 기대하는 주행적 특성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낮은 차체에서 비롯되는 안정감, SUV에 비해 민첩한 움직임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주행 특성은 승용차에서 차체를 떠받치는 사다리꼴 프레임이 사라지고 일체형 차체 구조(모노코크)가 쓰이기 시작하면서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1930년대까지만 해도 여러 자동차 업체가 하나의 차체 구조를 가지고 세단에서 쿠페, 픽업트럭에 이르는 다양한 장르의 차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단의 개념과 특징은 한 세기 남짓한 시간에 걸쳐 큰 변화를 겪었다. 다양성이 중요한 가치가 되고 있는 요즘의 사회적 흐름을 보면 세단이 자동차 장르의 주류로 인정받을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이 남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세단이 갖고 있는 럭셔리한 이미지는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만큼, 적어도 럭셔리 브랜드에서의 세단의 입지는 앞으로도 다양한 변화를 거치면서 꾸준히 유지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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