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의 지령문(指令文), 즉 명령문이 날아들었습니다. 거기엔 ‘발행을 금지함’이라고 쓰여 있었죠. 바로 월간잡지 ‘개벽(開闢)’을 폐간한다는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의 일방 통보였습니다. 1926년 8월 1일자였죠. 1920년대 전반 우리 지성계를 사로잡았던 개벽은 이 명령으로 사망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최후의 극약조치인 폐간의 이유가 너무나 모호했습니다. ‘안녕 질서를 방해하는 것으로 인정됨’이라는 구절이 전부였으니까요. 지령문을 받아든 개벽의 발행인 이두성은 “갑자기 당한 일이라 아무 생각이 없다. 지령문에 나온 구절 이외에 어떤 말도 듣지 못했다”라고 어찌할 바를 몰라 했죠. 발행기간 내내 ‘조선 유일의 대표적 종합잡지’라고 평가받던 개벽은 사실 창간호부터 혹독한 시련을 겪었습니다.
월간잡지 개벽은 1920년 6월 25일에 창간호를 발행했습니다. 3·1운동으로 동아일보 등 신문과 잡지가 태어날 공간이 열린 덕분이었죠. 개벽은 천도교청년회가 개벽사를 만들면서 낸 첫 작품이었습니다. 천도교청년회는 예산의 60%를 개벽사 운영에 쏟아 부을 정도로 헌신적이었죠. 잡지 이름은 1세 교조 최제우가 참형당하기 전 외쳤던 “…천하의 번복운수, 다시 개벽 아니런가!”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제는 창간호라고 봐주지 않았습니다. 몇몇 기사는 물론이고 표지의 호랑이 그림에 ‘불가’ 판정을 내려 압수했죠. 서둘러 다시 편집해 호외판을 냈지만 이마저도 압수였습니다. 결국 5일 뒤 호랑이 그림까지 뺀 임시호를 내야 했죠. 독자들은 매진으로 응답했습니다. 창간 임시호 재판 발행은 국내 잡지역사상 최초였죠.
일제강점기 때 잡지는 발행하기 전후로 원고를 ‘이중검열’했습니다. 그런데도 개벽은 모두 72호까지 내는 동안 판매금지 34회, 발행정지 1회, 벌금 1회를 받았죠. 총 발행호수의 절반 정도를 판매 금지했으니 개벽사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렇지만 천도교는 무릎 꿇지 않았습니다. 압수하면 호외를 내고, 호외마저 압수하면 임시호를 내는 식이었죠. 25호 임시호 알림 끝부분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형제여 우리 마음은 아프외다 괴롭소이다. 그렇지 않아도 모든 것이 여의치 않은 우리로…다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비록 활이 꺾이고 화살이 바닥날지라도 나아갈 것뿐이외다. 형제여 우리의 괴로움과 쓰라림을 살펴줄 수가 있겠습니까.’ 이 애달픈 호소로 그때 개벽사의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개벽은 ‘열린 잡지’였습니다. 천도교가 재정 지원을 도맡다시피 했지만 천도교 관련 기사는 전체의 2%에 불과했죠. 대신 독자가 원하는 내용, 민족이 나아갈 방향을 좌우 구분 없이 실었습니다. 이돈화 김기전 박달성 방정환 차상찬 등의 사내 필진은 당시 사회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촉각을 곤두세워 지면에 반영했죠. 1922년에는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을 실어 문명화 근대화의 절박함을 알렸습니다. 물산장려운동 같은 실력양성론에도 앞장섰죠. 1923년에는 ‘민족적 중심세력’ 구성을 주창했습니다. 동아일보 주필 송진우가 1922년부터 제기한 주장과 같은 맥락이었죠. 여기엔 천도교의 전국적 조직을 염두에 둔 자신감이 깔려 있었습니다. 1923년 이후에는 사회주의 관련 글을 크게 늘려 ‘사상 잡지’나 다름없었죠.
개벽은 ‘문학잡지’이기도 했습니다. 민족시인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개벽에 발표됐죠. 김소월의 ‘진달래꽃’과 현진건의 ‘빈처’ 등도 지면을 빛냈습니다. 최초의 시 전문지 ‘장미촌’ 동인이었던 박영희가 개벽사의 학예부장으로 활약했죠. 이 때문에 개벽을 ‘문화·민족·계급담론 최고 선전장이자 전장(戰場)’이었다고 말합니다. 당시 청년들은 외출할 때면 습관처럼 옆구리에 개벽을 끼고 다녔답니다. 지성인 대접을 받는 지름길이었기 때문이죠. 사회주의자 박진순이 쓴 ‘모스크바에 새로 열린 국제농촌학원’이 개벽 폐간의 원인이라고 알려졌습니다. 일제는 폐간 조치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72호 전부를 수레로 종로경찰서 뒷마당으로 실어가서 작두로 모두 잘라버렸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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