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 터치 몇 번이면 갓 만든 음식이 집까지 배달된다. 오후 9시에 택배를 주문해도 다음 날 문 앞에 물건이 와 있다. 주문할 때 도착지 주소만 제대로 적는다면 말이다. 주소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당장 택시를 타는 것도 힘들어진다. 목적지를 제대로 얘기할 수 없어서다. 택배 주문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주소는 이처럼 우리 삶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작가이자 변호사인 저자는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주소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탐구했다. 주소에 얽힌 역사를 들여다보면 주소가 행정적 목적뿐 아니라 권력 작용의 결과임을 알 수 있다. 국가가 세금을 매기고 치안을 유지하며 범죄자를 찾아 투옥하기 위해 주소를 만든 게 대표적이다.
영국 런던에서는 중세시대부터 근처 나무의 종류나 강, 건물 이름 등에서 착안해 도로명을 지었다. 런던에 ‘처치 스트리트’나 ‘스테이션 로드’ 같은 도로 이름이 흔한 이유다. 주변 지형을 이용하다 보니 주소 속에는 자연스레 지역 역사가 녹아 있다. 1310년 영국은 공식적으로 매춘부들을 도시 성곽 밖으로 추방했다. 현재 영국 슈루즈베리 지역에는 그로프 레인(Grope Lane)이라는 이름의 거리가 있다. 그로프는 몸을 더듬는다는 뜻으로, 매매춘이 이뤄진 지역에 이런 도로명이 붙었다. 특히 도시 한복판이나 대형 시장 근처에 이런 이름의 거리가 많았다. 정부가 금지했지만 암암리에 도시 한가운데에서 매매춘이 행해진 사실을 주소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주소는 권력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기도 한다. 13세기부터 650여 년간 오스트리아 왕실을 지배한 합스부르크 왕가는 18세기 프로이센, 영국, 포르투갈 등의 도전을 받았다. 당시 왕가를 이끈 마리아 테레지아(1717∼1780)는 현 폴란드 영토인 슐레지엔 땅을 숙적 프로이센으로부터 되찾고자 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전장에 나갈 젊은 남성을 징집했지만 봉건지주들이 힘세고 성실한 농노들을 숨기고 그렇지 않은 이들을 내보냈기 때문이다. 이에 테레지아는 모든 가구에 번호를 매겨 거주자 명단을 작성하는 묘안을 낸다. 그 결과 110만이라는 총 가구 수와 더불어 700만 명의 전투 가능한 사람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이제는 누구나 주소를 갖는 게 당연한 세상 같지만 21세기에도 주소가 없는 이들이 있다. 인도 콜카타의 오랜 빈민촌인 체틀라 주민들은 주소가 없어 은행 계좌를 못 만드는 이들이 적지 않다. 계좌가 없으면 저축을 할 수 없고 대출도 못 받는다. 심지어 신원증명서조차 발급받을 수 없다. 정부의 각종 복지 혜택에서도 제외된다. 주소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이들은 빈민촌을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었다. 그런데 지역 사회복지사의 ‘주소 만들어주기’ 운동을 계기로 이들도 주소를 갖게 됐다. 이후 이들은 자신이 사는 지역에 소속감을 갖게 됐다. 주소를 통해 사회의 일원이 됐다는 인식을 하게 되면서 시민으로서 정체성도 생긴 것이다. 동시에 세금을 납부하며 국가의 통제를 받게 됐다.
저자는 주소를 정체성의 문제와 연결짓는다. 특정 지역이 변화해온 역사가 주소에 담겼고, 그곳에 사는 이들의 성격을 규정해서다. 때로는 주소가 집값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이 책 독자들은 책장을 덮는 순간 자신이 살고 있는 집 주소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몹시 궁금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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