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이여, 달빛 밟고 무사히 오소서” 정읍사 여인과 걷는 그 오솔길[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2월 4일 12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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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가요 정읍사 오솔길


숲속의 작은 연못. 물 위에 붉은색, 갈색, 노란색 낙엽이 가득 떨어져 있다. 우수에 젖은 늦가을 습지 위로 비친 하늘빛이 신비롭다. 톡톡 토로로…. 어디선가 숲속의 괴물처럼 생긴 애니메이션 주인공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풍경이다.

전북 정읍시의 소나무숲 오솔길에서 만난 월영습지. ‘월영’은 달그림자라는 뜻이다. 천 년 전 장에 가서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던 정읍사 여인이 바라보던 달도 이 습지에 휘영청 달그림자를 띄웠을 것이다. 천 년의 아름다운 사랑과 문학, 자연생태가 살아 있는 ‘백제가요 정읍사 오솔길’을 걸었다.

새암바다 마을의 부부나무
지난달 17일 저녁 정읍시내 공연장인 연지아트홀. 국악인 오정혜가 진행하는 토크콘서트 ‘농담’의 초청 게스트인 재즈 가수 ‘말로’는 관객들에게 “정읍에 와서 받은 첫인상은 ‘정이 넘치는 마을’이라는 느낌”이라고 인사했다.

가을이면 붉게 물드는 내장산의 애기단풍이 절경을 이루고, 애틋한 가시버시 사랑을 노래한 백제가요 ‘정읍사’와 조선 선비의 풍류가 깃든 가사문학 ‘상춘곡’의 고향인 정읍은 역사와 문화가 깃든 ‘정(情)이 넘치는 동네’가 맞다. 그러나 정읍(井邑)의 원래 뜻은 ‘우물(井)이 있는 마을’이다. 예로부터 삽을 들고 땅을 파기만 하면 곳곳에서 차고 맑은 물이 솟아 ‘샘고을’이라고 불렸다. 내장산에서 발원한 정읍의 물은 김제평야를 적시고 동진강을 따라 서해안으로 흘러간다. 정읍은 지금도 물이 맑은 동네로 유명하다.

백제가요 ‘정읍사’의 고향을 찾아가는 여행은 ‘정해마을’에서 시작한다. ‘정해(井海)’는 말 그대로 샘물이 바다처럼 흐르는 ‘새암바다’다. 백제시대 ‘정촌현(井村縣)’으로 불렸던, 정읍의 시원이 된 마을이다. 윤기 흐르는 감들이 익어가는 마을 한가운데에는 큰 우물이 있고, 그 옆에는 정읍사의 애틋한 사랑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부부나무’가 서 있다.

아름드리 왕버드나무와 팽나무가 마치 탱고를 추는 듯한 모습이다. 허리를 한껏 꺾은 버드나무 옆에 배를 맞댄 팽나무는 손을 잡고 있다. 400년 넘게 얼싸안고 춤을 추던 나무는 서로 몸이 붙어 연리목(連理木)이 됐다.

마을 인근에 있는 ‘정촌가요특구’ 테마공원에 가면 정읍사 여인의 망부석 동상이 서 있다. 이 동상 맞은편으로는 내장산 봉우리들이 한눈에 바라다 보인다. 내장산의 능선 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여인의 눈썹과 콧날, 입술과 가슴, 손까지 형상이 또렷이 드러나 신비로운 느낌을 준다.


백제가요 정읍사 오솔길

“달하 노피곰 도다샤/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칠백 년 넘게 구전돼 오다가 악학궤범(1493년)에 실려 전해오는 ‘정읍사’는 한글로 표기된 우리나라 최초의 가요다. 해는 이미 기울었고 어둠은 깊어가는데, 행상을 나간 남편은 돌아오지 않는다. 아내는 아양산 고개에 올라 달님에게 빌며 하염없이 노래를 부른다. 제발 달님이시여 높이 솟아 밝은 빛을 멀리까지 비춰주소서. 저자(시장) 거리를 헤매고 있을 남편이 혹시나 진 데를 밟지 않게 해주소서. 내 사랑하는 님이 곱게 깔아놓은 달빛을 밟고 무사히 돌아오게 해주소서….

그중에서도 가장 절절한 구절은 ‘어느이다 노코시라(어느 곳에나 다 내려놓고 오세요)/어긔야 내 가논대 졈그랄셰라(아, 내 님 가는 곳에 날이 저물까 두렵습니다)’는 노랫말이다. 일이고, 돈이고, 물건이고…. 힘겹게 지고 있는 모든 짐을 내려놓고, 그저 몸 성하게 집으로만 돌아오라는 말이 가슴을 적신다.

정읍사문화공원에서 내장저수지까지 이어지는 ‘백제가요 정읍사 오솔길 1코스’(6.4km)는 정읍사 여인을 테마로 역사와 문화 스토리텔링이 이어지는 걷고 싶은 길이다. 달님약수터에서 출발해 전북과학대를 지나 천년고개로 넘어가는 길은 ‘월봉(月峰) 등산로’다. ‘달하…’라는 말이 튀어나올 듯한 소나무숲 달맞이 고개다.

곳곳에 전망대가 있어 내장산과 칠보산, 방장산 등 산세와 평야를 구경하고, 두꺼비바위에서 쉬어가기도 한다. 산굽이마다 만남과 환희, 고뇌, 언약, 지킴, 배려 등 사랑을 주제로 한 글귀도 꾸며져 있다.

“기다림 때문에 죽을 수 있다는 것은 슬프지만 아름답다. 기다림이란 절망 속에 피어나는 희망의 꽃과 같다. 그러므로 기다릴 줄 아는 사람만이 사랑할 수가 있다. 사랑받을 수 있다.”(문순태 설화소설 ‘정읍사-그 천년의 기다림’ 중에서)

오솔길을 계속 걷다보면 ‘월영습지’를 만난다. 늦가을 정취가 가득한 월영습지는 2014년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된 저층형 산지습지로 과거에 벼농사를 했던 폐경지가 자연 천이에 의해 복원된 습지다. 월영습지에는 구렁이, 수달, 말똥가리, 수리부엉이, 수달 등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종을 포함한 다양한 야생 동식물이 살고 있다. 평지와 산지의 특성을 모두 가지는 독특한 생태계로 절대보전등급 1등급을 받은 습지로, 인근의 솔티마을숲과 함께 자연생태가 살아 있는 생태관광지로 각광받고 있다.

월영습지에서 더 걸어가면 시누대숲이 나오고, 내장호로 이어진다. 내장호 수변 덱(deck)길을 한 바퀴 도는 2코스(3.5km), 자전거를 빌려 타고 강변을 따라 정읍사공원으로 회귀하는 3코스 자전거길(6.2km)도 있다. 정읍시 문화특화지역 조성사업단을 운영하는 사회적기업 ‘둘레’의 안수용 이사장은 “백제가요 정읍사 오솔길은 연인이나 부부가 사랑의 의미를 찾고, 소나무와 호수가 어우러진 생태를 탐방하는 힐링 숲길”이라고 말했다.



내장산과 무성서원
백제가요 정읍사 오솔길의 끝에는 내장산이 있다. 늦가을 내장산의 애기단풍 터널은 마지막 힘을 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내장산의 ‘내장(內臟)’은 안에 보물을 품고 있다는 뜻. 임진왜란 당시 전주사고에 보관돼 있던 조선왕조실록 805권을 정읍 태인의 선비 손홍록과 안의가 내장산으로 옮겨와 석벽의 ‘용굴’에 감추고는 1년이 넘도록 머물며 지켰다. 서울, 충주, 성주에 나눠 보관하고 있던 조선왕조실록이 모두 다 불타고 사라지고 남은 마지막 실록이 내장산 선비들 덕분에 지켜질 수 있던 것이다.

그러나 올 3월에 방화로 전소됐던 내장사 대웅전의 현재 모습은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내장산의 수려한 봉우리와 전각들로 둘러싸인 대웅전이 철제 컨테이너박스로 임시로 지어진 모습은 마치 현대미술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컨테이너 대웅전에 걸린 ‘큰 법당’이라는 현판의 글씨에서는 힘이 넘쳐 그나마 관람객의 마음을 달랜다.

내장산을 구경한 후 발길을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무성서원(武城書院)’으로 옮긴다. 신라시대 문장가 최치원(857~?)과 조선시대 ‘상춘곡(賞春曲)’을 지은 선비 정극인(1401~1481) 등이 배향돼 있는 서원이다.

‘홍진에 뭇친 분네 이내 생애 엇더한고/넷 사람 풍류랄 미찰가 맛 미찰가’로 시작되는 ‘상춘곡’은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안분지족을 노래한 최초의 한글 가사문학이다. 주변에는 선비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고택도 많다.
정읍 시내의 유명한 ‘쌍화차 거리’엔 날씨가 추워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뜨겁게 달군 곱돌 찻잔에 담겨 나오는 정읍식 쌍화탕은 지황 생강 등 20여 가지 약재를 달인 뒤 밤 은행 잣 등의 고명과 함께 숟가락으로 떠먹는다. 정읍은 쌍화탕 주원료 약재인 지황이 전국 생산량의 70%를 차지할 정도로 주산지였다고 한다. 한 잔에 7000원인 쌍화차를 주문하면 가래떡구이와 누룽지 등 업소마다 다양한 간식거리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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