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교의 조선’이라는 월간잡지가 있었습니다. 조선총독부 산하 교사단체인 조선교육회가 1925년 9월 창간했죠. 일본어로 찍어냈고 식민교육 보급을 주목적으로 했습니다. 1926년 2월호에 ‘이른바 단군전설에 대하여’라는 글이 실렸습니다. 경성제국대학 예과부장인 오다 쇼고(小田省吾)가 썼죠. 한 줄로 요약하면 ‘삼국유사에만 나오는 단군 개국전설은 기껏해야 고려 중기 이후부터나 통용됐다’ 정도가 됩니다. 단군이 기원전 2000년이 넘는 중국 고대 요임금과 맞먹는 존재라는 우리 인식을 깔아뭉개는 주장이었죠. 3년 전 총독부가 펴낸 ‘보통학교 국사 교수 참고서 조선사력 교재’에 나오는 내용과 같았습니다. 대신 한반도에서 제일 먼저 나라를 세운 이는 기자(箕子)라고 했죠. ‘기자조선’의 그 기자입니다.
고조선 개국시점을 절반 이상 깎아내리는 일제의 이런 주장이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청일전쟁이 일어났던 1894년 나카 미치요(那珂通世)가 단군은 한반도에 불교가 들어온 뒤 승려가 지어냈다고 했죠. 병합 때가 되면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평양 옛 지명이던 왕험(王險)이 고려 초에 인명인 선인왕검(仙人王儉)이 됐고 고려 중기에 단군이라는 존칭이 붙었다고 했고요. 어느 주장이든 한민족의 활동시기와 공간을 크게 줄여놓으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죠. 기자조선으로 첫걸음을 떼었건, 위만조선으로 시작했건 우리 역사가 출발부터 다른 민족의 지배를 받았고 이후 그 틀이 이어졌다는 ‘타율성론’은 공통요소였습니다. 우리 밑바탕에는 식민통치 요소가 원래부터 있었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죠.
일찍이 단군을 건국시조 또는 민족시조로 가르쳤고 1909년부터 개천절을 지키면서 민족의 구심점을 형성해왔던 우리 선조들은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화를 낸 사람이 육당 최남선이었죠. 직접 ‘단군절’ 창가를 짓기도 했고 단군을 섬기는 대종교 2대 교주 김교헌의 가르침을 깊이 받아들였던 그로서는 당연한 일이었을 겁니다. 기미독립선언서를 지은 죄(?)로 감옥에 갇혀 있을 때부터 단군 연구에 몰두했던 최남선은 일제가 걸어온 역사전쟁에 정면으로 맞섰죠. 동아일보가 지면을 제공했습니다. 최남선은 조선광문회, 시대일보를 거쳐 1925년 8월부터 동아일보 촉탁기자로 일하고 있었죠. 동아일보는 창간 직후인 1920년 4월 11일자부터 ‘단군영정 현상모집’에 나설 정도로 단군 수호에 적극적이었고요.
먼저 최남선은 사설 ‘단군 부인의 망(妄)’ 상, 하를 썼습니다. 망(妄)은 ‘망령되다’는 뜻입니다. 문교의 조선에 실린 오다의 글을 ‘망론패설(妄論悖說)’이라고 했고 저네들의 단군말삭론(檀君抹削論)은 근시안적이고 천박하다고 비판했죠. 말삭(抹削)은 지워 없앤다는 의미입니다. 그 방법론도 눈 감고 지팡이를 휘두르며 독설을 나불거린 것에 불과했다고 맹공격했죠. 그래도 모자랐는지 1926년 3월 3일자부터 ‘단군론’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최남선은 일제 학자들의 망령된 주장은 우리의 혈(血)과 심(心)을 모욕하는 것이기에 묵과할 수 없다고 했죠. 이 연재는 무려 77회나 이어졌습니다. 그는 연재를 시작하면서 ‘글을 쓴 뒤에 붓대를 내어던져도 좋다’는 필사의 각오를 밝히기도 했죠.
최남선은 불교 발상지 인도의 백향목인 ‘우두전단(牛頭旃檀)’에서 단군(檀君)이 나왔다는 주장에 삼국유사를 들이댔습니다. 거기엔 ‘나무 목’ 단군이 아니라 ‘흙 토’ 단군(壇君)으로 돼 있죠. 승려 날조설을 가볍게 물리친 근거였습니다. 그래봐야 단군은 왕험(평양)의 토착신일 뿐이라는 주장은 선인왕검의 왕검은 상경(上京)을 뜻하는 ‘엄검’이고 선인은 산악도(山岳道)의 실존하는 단군이라고 맞섰죠. 중국 서적엔 그 오래됐다는 단군이 왜 없냐는 일제의 문헌학에 민속학과 언어학으로 대응한 획기적 시도였습니다. 그 바탕엔 인도문화와 중국문화를 넘어선다는 그의 불함문화가 있었죠. 최남선의 이론은 민족주의에 불타는 대중의 뜨거운 지지를 받았죠. 단군론은 시작에 불과했고 그가 그린 단군 모습은 계속 바뀌어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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