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대 후반이었던 은사는 중국요리를 좋아했다. 정기적인 모임이 있었는데 은사의 입맛에 맞는 중식당을 찾는 게 총무의 고민이었다. 하루는 모처럼 서울 광화문에 있는 새로운 중식당에 가게 됐다. 은사가 처음 방문한 식당이라 어떤 음식이 맛있냐고 묻자 매니저는 일본식 중식을 표방하고 있으며 덜 자극적이면서 섬세한 중식 맛이라고 답했다. 그 순간 쩌렁쩌렁한 은사의 목소리가 홀에 울렸다. “중식이면 중식이고 일식이면 일식이지 일본식 중식이란 말이 어디 있는가? 똑바로 알고 장사를 해야지”라는 것이다. 평소 너무 어렵기만 한 은사의 호령에 차마 매니저를 두둔하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중식에는 수없이 많은 장르와 응용이 있다는 말을 못한 용기 없음에 피식 웃음이 나온다.
톡톡 튀는 개성과 트렌디한 감성의 젊은 외식 공간을 경험하고 싶을 때에는 서울 성동구 성수동을 찾는다. 그곳에서 ‘플레이버타운’을 만났다.
브로콜리 샐러드에 템페(인도네시아 발효식품), 바질, 보리, 파르메산 치즈가 들어가 있다. 단순한 비주얼의 샐러드인 듯하나 맛의 혼합이 남다르다. 흔한 외식 메뉴인 족발도 재탄생했다. 뼈를 정성스레 발라낸 족발의 모양을 다시 잡아 생강향을 더해 반짝반짝 캐러멜화했다. 재래시장 족발도 나름의 윤기를 주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는데 이 또한 일맥상통인 건가? 먹음직스러운 광택을 머금은 족발 위에 고수를 듬뿍 얹으니, 맛도 멋도 진정 이국의 느낌이다. 한참 유행인 몐바오샤(멘보샤) 같은 새우토스트 위에 창펀(광둥지역 쌀반죽피)이 나오고 간장 조림한 돼지고기 목살 차슈를 팬케이크라 불리는 밀전병에 싸먹게 한다.
삭힌 고추를 잘게 다져 소복이 덮어낸 우럭술찜 요리는 생선살을 야무지게 발라 먹은 뒤에도 밥 한 공기를 뚝딱할 수 있도록 만드는 마성의 소스가 압권이다. 술맛이 가미된 간장과 촉촉한 생선살도 만족스러운데 발효의 민족성을 가진 우리에게 삭힌 고추의 조화는 행복 그 자체다.
메뉴북을 둘러보다 육회 메뉴에 흥미가 생겼다. 육회와 낙지에 마늘칩이 어우러지는데 그것을 김에 싸먹게 한다. 짭조름! 낙지탕탕이를 즐기는 목포 토박이 어르신이 먹는다면 진지하지 못하다고 한마디 할지 모르겠다. 이 참신하고 개성 넘치는 육회 메뉴를 보고 5년 전 호주 시드니 여행 때 만난 ‘KIM RESTAURANT’ 셰프의 맛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이곳 이태규 셰프는 시드니에서 프렌치 요리를 전공하고 현지에서 호주인 셰프와 한국 음식을 알리기 위해 창작 한식 비스트로를 멋지게 운영했던 경력이 있다. 그리고 요리하는 아내를 만나 핀란드, 마카오, 홍콩, 중국 등지를 돌며 맛 여행과 현지 조리 업무를 했다.
요즘 접시에 펼쳐진, 만든 이의 경험 속에서 나온 중첩의 맛, 트렌디한 조합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은사가 이곳에 오면 국적 불명이라고 또 호통을 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용기가 생겨 은사 앞에서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셰프의 발자취가 플레이버타운의 장르이자 시대의 인기 요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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