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포밭 못 가운데/ 소금쟁이는/ 1234567/ 쓰며 노누나// 쓰기는 쓰지만두/ 바람이 불어/ 지워지긴 하지만/ 소금쟁이는// 싫다고도 안 하고/ 뺑뺑 돌면서/ 1234567/ 쓰며 노누나’ 1925년 동아일보 제1회 신춘문예 동요 1등작 ‘소금쟁이’ 전문입니다. 바로 눈앞에 보는 듯하고 운율도 뛰어나죠. 그런데 이런 일본 동요가 있었습니다. ‘小池の小池の みづすまし/ いろはにほへと 書いてゐる/ 書いても書いても 風が來て/ 消しへは行けど みづすまし/ ぁきずにぁきずに お手習ひ/ いろはにほへと 書いてゐる’ 번역해 보면 ‘작은 연못 작은 연못 소금쟁이는/ 이로하니호헤토 쓰고 있네/ 써도 써도 바람이 불어와서/ 지우고 가는데도 소금쟁이는/ 싫지 않아 싫지 않아 글자연습을/ 이로하니호헤토 쓰고 있네’ 쯤 됩니다.
히라가나를 쉽게 외우라고 만든 ‘이로하니호헤토’를 ‘1234567’로 바꿨을 뿐 두 동요가 아주 비슷합니다. 급기야 동아일보 1926년 9월 23일자 ‘문단시비’란에 ‘소금쟁이는 번역인가’ 기고가 실렸죠. 집안의 15세 아이가 6학년 여름방학 학습장에 실린 일본 시인 사이죠 야소(西條八十)의 동요라며 들고 왔답니다. 아이는 “뻔뻔하게 제가 시인이라고…”라며 1등 작가 한정동을 향해 욕까지 했다죠. 15세 소년 눈에도 같은 작품으로 비쳤으니까 누가 봐도 마찬가지였겠죠. 일본 동요는 1924년 7월에 실렸으니 늦게 발표된 1등 동요가 표절 혐의를 뒤집어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고자는 일본 동요를 본 순간 한정동의 야비한 행동이 말할 수 없이 미워졌다고 했죠. 나아가 베껴 낸 작품을 1등 수상작으로 고른 심사위원의 책임도 거론했습니다.
열흘 정도 지나 반박문이 ‘문단시비’란에 실렸습니다. 공개 비판하지 않아도 될 일을 떠벌였다고 나무라는 논조였죠. ‘소금쟁이’가 번역이라고 해도 명작동요 아니냐, 이 정도로 번역을 한다면 앞으로 명작 동요도 많이 나올 거라고 덧붙이면서요. 심사위원이었던 김억도 뒤이어 기고했죠. 일본 동요를 보니 ‘소금쟁이’를 창작으로 인정할 수 없게 됐지만 어쨌건 우리 어린이들이 좋은 동요를 읽게 됐으니 잘된 일 아니냐는 투의 변명론이었죠. 당사자인 한정동도 2회 연속 글을 실어 ‘소금쟁이’를 처음 발표한 시점은 1923년이었고 번역이라곤 해본 적도 없었다고 해명했습니다. 너무나 이상하게도 일본 동요와 자기 작품이 같기 때문에 독자들이 오해할까봐 창작과정을 알린다는 취지였죠.
하지만 두둔과 변명, 해명도 비판의 거센 파도 앞에서는 무력했습니다. 두 동요를 비교하면 번역으로 볼 수밖에 없고 결국 글 도적놈이나 흡혈귀 짓이었다는 맹공격이 이어졌죠. 워낙에 동요작가가 없으니 남의 작품을 번역해 냈더라도 봐줘야 하지 않느냐는 옹호론은 ‘인구가 적은 나라에서는 살인, 강도를 해도 죄를 묻지 말라’는 식이냐며 되치기를 당했죠. 이 과정에서 난데없이 소파 방정환에게 불똥이 튀기도 했습니다. 방정환도 서덕요라는 소년이 쓴 동요 ‘허잽이’를 자기 이름으로 동요집에 실었다는 고발이 나왔거든요. 방정환은 자신이 주관하는 ‘어린이’ 잡지에 동요가 부족해 서삼득이라는 가명으로 자기 동요를 실었고 이후 본명으로 냈었노라고 전후 사정을 해명해야했습니다.
동아일보는 최초의 아동문학 표절공방 10회 뒤 편집자 명의로 글을 실었죠. ‘번역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1923년에 썼다는 증거를 내지 못했다. 표절의 이름을 벗을 수 없다. 상금을 물리는 편이 양심에 좋을 것’이라고 작가의 행동을 촉구했죠. 하지만 작가는 창작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편친 않았는지 1927, 1958년에 ‘소금쟁이’를 거푸 고쳐 썼지만 아무래도 처음 수준엔 미치지 못했죠.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국민동요 ‘따오기’ 아시죠? 한정동의 재능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57세에 월남하면서 그간 써둔 300여 편은 두고 왔다죠. 75세이던 1969년에 그동안 절약해 모은 돈으로 ‘한정동아동문학상’을 만들었습니다. 격려가 창작을 북돋운다면서요. 올해 제49회 시상식이 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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