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테넷’과 ‘백투더퓨처’, ‘터미네이터’의 공통점. 미래를 미리 내다볼 수만 있다면 온전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는 믿음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샤머니즘의 존재에도 투영돼 있다. 샤먼들은 춤이나 환각제 등을 통해 일상의식을 벗어난 상태에서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고 여겨졌다. 별이나 동물의 뼈, 장기 모양을 보고 점을 치는 행위도 마찬가지. 현대에 들어서는 샤먼이나 점쟁이의 역할을 과학자나 인공지능(AI)이 대신하고 있다. 과연 미래를 예측하는 건 가능할까? 그리고 바람직할까?
전쟁사학자로 이스라엘 히브리대 교수인 저자는 이 책에서 미래를 예측하고자 한 인류의 다양한 시도를 들여다보고 있다. 그에 따르면 미래를 내다보는 방법은 역사가 순환 반복된다는 관점과 그렇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관점으로 크게 나뉜다. 예컨대 사마천 사기 등 동서양 고전들에서 현재와 유사했던 과거를 찾아 해답을 구하는 방식이 전자에 해당한다. 과거와 현재에 이르는 추세를 연구하고 이를 미래에 적용하는 ‘외삽법’이나, 모순을 통한 정반합의 변화를 추적하는 ‘변증법’은 후자에 속한다. 진화심리학자 스티븐 핑커는 일종의 외삽법을 이용해 인간의 폭력성이 갈수록 줄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인류 미래를 긍정적으로 전망한다. 반면 헤겔의 변증법 전통을 이어받은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모순이 불러올 계급투쟁의 혼란을 예언했다.
그런데 문제는 샤머니즘 등에 비해 훨씬 과학적이라는 예측법들도 객관성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추세나 변화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에 각자의 감정이 개입될 수밖에 없어서다. 이 지점에서 저자는 ‘생각 자체는 그저 감정의 그림자일 뿐’이라는 니체의 말을 인용한다.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첨단 AI가 제공하는 확률 데이터도 미래 예측에는 허점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와 이를 확장한 ‘관찰자 효과’가 그 이유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아원자 수준에서 소립자의 위치와 운동량 중 하나는 측정할 수 있지만, 두 개를 동시에 파악하는 건 불가능하다. 이를 미래예측에 대입해 보면 무언가를 관찰하려는 시도 자체가 나비 효과처럼 결과에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관찰자 효과)이다. 그러니 애초부터 어떠한 최첨단 기법을 동원해도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는 건 불가능한 셈이다.
그렇다면 예측 행위는 무용하기만 한 걸까. 이에 대해 저자는 미래를 예측하고자 하는 행위는 인간성의 본질에 해당한다고 강조한다. 실효성 여부를 떠나 시간의 강력한 제약을 받는 인간이 희구할 수밖에 없는 욕망이라는 얘기다. 9·11테러나 동일본 대지진, 나치 인종학살 같은 이른바 ‘블랙 스완(black swan·통계학적으로 발생할 수 없지만 결국 일어나는 사건)’이 존재하는 한 미래를 내다보고 비극을 막고자 노력하는 시도는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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