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모습이 비쳐 나왔는데 작은 조각에 불과했다. 라사지(羅斯紙) 위에 진면목이 완연히 박혀 있었다.”
조선 사절단이 청나라를 방문했을 당시 수행원으로 간 말단 관리 이항억이 쓴 글이다. 이항억은 음력 1863년 1월 29일 베이징 주재 아라사관(러시아공사관)에서 신문물인 사진을 처음 목격했다. 러시아 사진가는 이들을 피사체로 사진을 찍었다. 며칠 뒤 인화된 사진을 본 이항억은 이를 ‘작은 조각’이라 표현하며 놀라웠던 당시 느낌을 ‘연행일기’에 기록했다.
이 책은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교수이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소장인 저자가 30년 가까이 한국 사진 역사를 연구한 결과물을 집대성한 책. 100여 년에 이르는 한국 사진사가 한 권에 담겼다. 저자에 따르면 서양에선 1840년대부터 사진이 실용화됐지만 조선은 1863년에야 이를 처음 접했다. 이마저도 이항억처럼 관광객 입장에서 구경한 수준. 1883년 정부 관리를 지낸 김용원이 한양 사대문 내(현재 서울 중구 저동)에 처음 사진관을 만든 것을 계기로 조선에도 하나둘 사진관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한국 땅에서 사진을 찍는 진정한 의미의 한국 사진사가 시작된 것이다.
저자는 조선으로의 사진 도입 과정, 일제가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사진을 악용한 역사 등을 두루 담았다. 예술사진 작가군이 처음 등장한 1920년대 후반 이야기와 사회주의 리얼리즘 사진과 살롱 사진으로 양분돼 좌우익이 대립했던 광복 직후 이야기 등 자칫 어려울 수 있는 사진사를 옛날 이야기하듯 쉽게 풀어냈다.
1934년부터 동아일보 사진부장을 지내며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 사건’을 주도한 한국 사진학의 선구자 신낙균 선생부터 1980년대부터 죽음에 대한 철학적 해석을 담아내는 등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시도를 끊임없이 보여준 구본창 작가 등 현대 작가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진사의 굵직한 인물도 총망라해 소개한다.
1863년 촬영된 조선 사절단의 굳은 표정을 한 인물 사진부터 무한한 형식의 현대 사진까지 사진과 도판 300여 점이 담겼다. 그 덕분에 600쪽에 가까운 두꺼운 책이지만 사진전을 보는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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