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2022/단편소설 당선작]무겁고 높은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월 3일 03시 00분


일러스트레이션 김충민 기자 kcm0514@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충민 기자 kcm0514@donga.com
땅에 붙인 두 발바닥. 그것이 시작이다.

바벨을 쥘 때는 엄지를 먼저 감고 나머지 네 손가락으로 감싼다. 무게가 실리면 엄지가 짓눌리지만 그래야 더 꽉 쥘 수 있다. 놓치는 것보다는 아픈 게 낫다. 다음은 무릎의 각도. 허벅지와 허리의 긴장. 그리고 등을 잡을 것. 다른 사람의 등이라면 붙잡을 수도 밀칠 수도 있겠지만 자신의 등을 어떻게 잡을까. 말로는 못해도 몸으로는 해내야 했다.

송희는 고개를 들었다. 목과 등, 허리의 자연스러운 정렬을 깨지 않는 범위에서 약간 위를 보는 게 좋다. 역도는 위로 솟는 운동이니까. 앉아서 시작하고 일어서서 끝낸다.

시선이 닿는 곳, 건너편 시멘트 벽 위에 붉은 문장이 있다.

오늘의 무게가 내일의 영광.

송희는 가장 간결하고도 견고한 움직임을 상상해봤다. 날아오를 듯 두 발로 바닥을 밀어낼 것. 그 힘으로 몸뚱이 대신 100킬로그램의 바벨을 쏘아 올리면 된다. 대회가 일주일 뒤였다. 송희는 3학년이다. 고교 선수로서는 마지막, 아니 그냥 마지막 대회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생각이 너무 길면 좋지 않다고도 생각했다. 호흡을 삼키고 복부를 단단히 잠갔다.

발바닥으로 지면을 누르며 바벨을 땅에서 떼는 순간, 송희는 이미 무언가 잘못 되었음을 느꼈다. 무게 밑에서 무너지는 자세. 빠져 나오는 게 늦으면 팔이 부러질 수도 있다.

지켜보던 코치가 가방을 챙겨 나가며 말했다.

너무 열심히 하지마. 다친다.

토요일 훈련은 오후 네 시까지였다. 다른 부원들은 어느새 역도화를 벗고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갈 곳과 먹을 것에 대해 떠드는 사이, 송희도 허기를 느꼈다. 송희는 올 초 63킬로그램급에서 58킬로그램급으로 체급을 내렸다. 선수가 겹쳐서 누군가 아래 체급으로 나가야 했다. 코치는 송희에게 감량을 지시했다. 졸업하면 실업팀을 소개해 줄 테니 걱정 말라는 말을 덧붙였다. 아는 감독님이랑 얘기가 다 됐다며. 무슨 뜻인지 송희도 알았다. 메달 하나 딴 적 없는 자기는, 끼워 파는 과자 같은 선수라는 걸.

나는 덤이 아니야.

그때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선택지는 분명해졌다. 덤이 되거나, 아무것도 못 되거나. 그걸 선택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송희는 방금 가슴에 얹지도 못하고 떨어뜨린 바벨을 봤다. 100킬로그램. 한 번도 머리 위로 들어보지 못했다. 사실 든다고 해도 그 정도로는 입상이 불투명했다.

송희는 역도장 뒷정리를 자청했다.

모두가 나간 뒤, 송희는 다시 역도대 위에 올라섰다. 딱딱한 바닥 위에서 역도화의 나무 굽이 둔탁하지만 튼튼한 소리를 냈다. 꼭 광부들의 작업화 소리처럼 들렸다.

송희는 그 소리를 이 동네 학생이라면 으레 서너 번쯤 견학하는 석탄박물관에서 들었다. 언젠가 탄광문화체험관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동네 사람들은 모두 박물관이라고 불렀다. 기록 영상 속에서 광부들은 갱도 입구를 향해 주저 없이 걷고 있었다. 그 흑백 화면은 너무 거칠었고, ‘광부’라는 단어는 종종 ‘전사’나 ‘백정’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따져보면 그렇게 오래전도 아니었다. 그 화면 속에서 젊은 시절의 아버지를 찾아보려고 한 적도 있었으니까.

광부들은 송희가 태어날 때쯤 광부가 아닌 무엇이 되기 위해 대개 어디론가 떠났다고 했다. 남은 광부들도 모두 작업화를 벗었다. 아버지도 그중 하나였다. 어떠냐, 양복 입으면 나도 폼 나지.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지만 송희는 아버지에게 양복이 어울린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특히 구두도 아니고 구두 모양을 흉내 냈을 뿐인 그 싸구려 캐주얼화는 어떻게 보아도 어설펐다. 술에 취한 아버지가 대충 벗어 던져 놓은 신발. 여러 번 꺾어 신어 주름진 뒤꿈치를 볼 때 송희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왜 이 모양이야.

송희는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 두기로 했다.

100킬로그램의 바벨은 그냥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

산지의 가을은 서둘러 추워졌다. 송희는 서늘한 공기를 마시며 역도장 문을 닫았다. 교정은 적막했다. 교사 외벽을 장식한 벽화만 알록달록했다. 아무도 없는 운동장의 인조 잔디는 지나치게 파랬다. 그 현란한 색상들이 송희에겐 예뻐 보이지 않았다. 학교는 학습만화 표지처럼 명랑하게 채색되어 있지만, 교문 밖으로 몇 발짝만 걸어도 여기가 어떤 동네인지 알 수 있었다. 해가 기우는 산등성이로 카지노가 보였다. 먼 나라의 성처럼 과장된 모양의 끄트머리는 근방 어디서든 눈에 띄었다.

용감하면 카지노 손님이 되고, 똑똑하면 카지노 직원이 된다.

이따금 교사들조차도 그렇게 말했다. 용감하지도 똑똑하지도 못한 대부분의 동네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는 송희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무엇이든 팔았다. 밥을 팔고 술을 팔고. 어떤 사람들은 모두가 쉬쉬하는 것을 팔았다.

송희는 술집과 전당포, 모텔과 마사지숍 사이를 걸었다. 아직 초등학생 티를 벗지 못한 애들 서넛이 편의점 앞에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상스러운 말을 떠들었다. 카지노 자살자를 위한 기도회 현수막은 수년째 같은 자리에서 낡아가고 있었다. 누군가 부임했다거나 당선되었다는 현수막은 늘 새것이었다. 간판 너머의 간판. 현수막 너머의 현수막. 배달음식 전단지 같은 풍경.

돈이 되지 않을 뿐, 아직 석탄이 많이 묻혀 있다고 했다. 송희는 땅 밑 깊이 퍼진 검은 광맥들을 상상해본 적이 있다. 상상 속에서 누군가 불을 놓았다. 땅을 뚫고 솟는 불길. 통째로 폭발하는 마을.

가끔 송희는 끊어진 철조망을 지나 길이 아닌 곳으로도 걸었다. 잡초가 무성한 공터에는 버려진 자동차들이 많았다. 주인도 찾아가지 않고 어디에 팔리지도 못한 것들. 먼지가 쌓인 차창에는 ‘병신’이나 ‘섹스’ 같은 낙서. 밤이 되면 문이 열리는 차 안으로 숨어드는 아이들이 있었다. 송희도 그랬던 때가 있다. 이제 그런 짓은 유치하지만, 공터를 지나 닿는 오래된 철교는 여전히 좋아했다.

검붉게 녹슨 철교 아래로 강이 흘렀다. 저무는 해가 탁한 녹색 물결에 빗살무늬를 만들었다. 시든 나뭇가지와 스티로폼 뭉치가 드문드문 무늬를 흐트러뜨렸다. 송희가 어렸을 때만 해도, 어른들은 철교 위로 열차가 다녔던 시절을 이야기했다. 석탄을 그득 실은 열차가 하루에도 몇 번씩 달렸다고. 그때는 학교에서 그림 그리라고 하면 강을 검은 크레파스로 칠했어. 그런 이야기를 하는 어른들의 얼굴만은 여전히 석탄처럼 까맸다.

누가 또 뛰어내렸다는데.

요즘은 열차 이야기보다도 그런 이야기가 자주 들렸다. 이 동네에 사람 안 죽어나간 데가 있나. 거기서 뛰어내려선 죽지도 못하지. 그런 말이 이어졌다.

철교에 올라서자 강바람이 살갗에 닿았다. 땀이 식어서인지 송희는 약간의 오한을 느꼈다. 오십여 미터가 채 안 되는 철교의 중앙에 사람이 있었다. 그 여자애라는 걸 송희는 알아봤다. 버스가 오지 않는 빈 정류장, 뼈대만 남은 비닐하우스, 누군가 마른 덤불을 모아 불을 붙인 공터에서 그 애는 혼자 서성거렸다. 모두가 누구의 친구이거나 적인 동네에서 송희는 그 애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자기와 비슷하거나 조금 큰 키, 어깨에 닿는 늘 젖은 머리를 기억할 뿐.

철교는 두 사람이 말없이 지나치기에 충분히 넓지만, 송희는 그 애가 자기에게 말을 걸어 올 것을 알았다. 늘 그랬으니까.

그 애가 언젠가 송희에게 처음 건넨 말은 이런 질문이었다.

너는 역도를 왜 해?

송희는 그때 이렇게 대답했다.

그냥.

송희가 역도를 시작한 건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중학교라고는 해도 지금 다니는 고등학교와 같은 교문으로 들어가고 같은 운동장을 사용했다. 소각장에서는 어른들의 눈을 피해 여러 일이 일어났다. 송희는 그게 조금 지겨워지고 있었다.

소각장에 가려다 괜히 샛길로 들어섰던 날이었을 것이다. 어디서 둔중한 소리가 들렸다. 무거운 것이 높은 곳에서 떨어져 땅에 부딪치는 소리. 역도장 문은 열려 있었다. 훈련 중인 아이들이 보였다. 다부진 몸의 아이들이 바벨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고 꼿꼿하게 섰다. 그리고 바벨을 바닥에 던져 버렸다. 내려놓는다기보다는, 내던졌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역도에 내려놓는 동작은 존재하지 않았다. 들었다면 그것으로 끝이기 때문에 그대로 바닥에 버렸다.

송희는 들어 보고 싶다기보다 버려 보고 싶었다.

역도장 구석에 서있던 빈 봉을 처음 잡았을 때, 송희는 그것이 이미 무겁다고 느꼈다. 검은 때가 잔뜩 밴, 길이 201센티미터, 무게 15킬로그램의 쇠막대. 아직 광택이 살아있는 봉은 ‘에이스’들의 것이었다.

무게는 다 똑같아.

코치는 말했다. 그건 사실이었고, 송희는 그게 왠지 마음에 들었다. 손가락을 감아 봉을 쥐었다. 서늘하고 단단한 금속의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빈 봉을 쏘아 올리며 한 계절을 보냈다.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였다가 뜯어지고 다시 박일 때쯤 봉이 울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하체의 힘이 봉에 제대로 전달됐을 때 울리는, ‘탕’ 하는 경쾌한 소리. 뒤따라 손 안에서 느껴지는 봉의 떨림. 아무도 없을 때는 더 작은 소리들도 들을 수 있었다. 진동하는 봉 안에서 작은 링과 티끌 같은 것들이 구르며 내는 메아리. 쌀알을 부어 넣은 페트병, 아버지가 흔드는 은단통, 혹은 수학여행지의 바다에서 들었던, 파도가 쓸어가는 굵은 모래 소리.

왜 하필 몸 쓰는 일이냐?

아버지는 불콰한 얼굴로 말했다. 요즘 세상에 누가 몸으로 돈 버니. 아빠 때나 배운 게 없으니 막장 가서 몸으로 때웠지 이젠 막장도 없어요. 운동? 운동판도 잘되려면 다 돈이고 인맥이다….

돈과 인맥. 아버지가 자주 하는 말이었다. 아버지는 돈과 인맥을 위해 술도 마시고 카지노도 다닌다고 호기롭게 주장했지만, 송희는 그 말을 믿지 않은 지 오래였다. 아버지는 종종 석탄박물관에 딸린 기념회 사무실로 출근을 했다.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무슨 위원이라는 아버지의 명함을 봐도 마찬가지였다.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는 생활비를 불규칙적으로 송희에게 주긴 했다.

오래전 아버지가 몸집은 작지만 힘이 세기로 유명했다는 이야기를 옆집 할머니에게 들었다. 탄광이 이미 기울었을 때지만, 고등학교도 마치기 전부터 남들보다 석탄 두 배를 캐고 세 배를 날랐다고. 마지막 파업에서도 젊었던 아버지가 궂은일을 했다고. 그러니 카지노도 들어오고 이만큼 사는 거라고. 이따금 아버지의 옛 동료들이 술 취한 아버지를 방에 밀어 넣으며 송희에게 오천 원짜리 만 원짜리를 쥐여 주고 갔다. 아버지의 표현에 따르면 ‘이제 카지노에서 청소나 한다는’ 근육 아저씨도 그중 하나였다. 아저씨는 까만 얼굴로 ‘그래도 너 애비가 애 많이 썼다’ 같은 말을 남기고 겸연쩍게 대문을 나섰다. 그랬을까. 파업이란 것은 어떻게 이기고 지는 것일까.

어머니는 카지노가 들어서고 얼마 되지 않아 집을 나갔다고 했다. 송희는 어머니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망할 년이 헛것을 자주 보더니 예수쟁이가 됐다고 말했다. 옆집 할머니는 니 애미한테는 신기가 있었다, 기도라도 해야 살지 안 그러면 못 살았다, 그렇게 말했다. 송희는 ‘주님의 영광’ 같은 말로 끝나는 어머니의 편지를 두 번 받은 적이 있었다. 어머니가 지낸다는 기도원의 풍경은 아름답게 묘사되었으나 정작 발신자 주소는 없었다. 기회를 보아 아주 태워 버리려고 편지를 서랍 속에 넣어뒀다. 그대로 몇 년이 지났다.

세상이 그렇게 반듯하지가 않아. 사기꾼 놈들이 얼마나 약았는데. 그래서 정보가 중요하다고. 정보.

아버지가 냄새나는 양말을 벗으며 설교했다. 아는 누구의 아들이 유도를 해서 대학까지 갔는데, 돈 없고 빽 없어서 심판 놈들이 어떻게 판정으로 장난을 쳤는지 아니. 말짱 헛힘 뺀 거야. 세상이 그래.

송희는 역도로 대학에 가거나 무엇을 얻겠다는 계획까지는 세우지 않았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역도는 아버지가 말하는 그런 건 아니었다.

들면 되잖아.

아버지가 의아한 얼굴로 뭘 들어, 하고 되물었다.

내가 들면 되잖아. 심판이든 누구든, 든 걸 어떻게 못 들었다고 해.

그때 다짐한 것만큼 무엇을 많이 들지는 못했다. 송희는 아버지를 대회에 부른 적이 없었다. 가끔 아버지는 역도 잘 되냐, 라고 물었다.

역도를 시작하고 송희는 거울 속의 몸을 더 오래 보게 되었다.

허벅지와 어깨에서 뚜렷해지는 근육들. 바벨에 수없이 긁혀 흉터가 생긴 정강이나, 무게에 눌려 멍이 든 쇄골도 어쩐지 싫지 않았다.

무거운 걸 들면 기분이 좋아?

그렇게 묻는 남자애가 있었다. 들지 못하던 것을 들면 물론 기뻤다. 하지만 버리는 기분은 더 좋았다. 더 무거운 것을 버릴수록 더 기분이 좋았다. 온몸의 무게가 일시에 사라지는 느낌. 아주 잠깐, 두 발이 떠오르는 것 같은. 송희는 그 느낌을 비밀로 남겨두었다.

나는 너무 마른 여자애들은 싫어.

공터에 버려진 차 안에서 그 남자애는 송희를 만졌다. 송희는 그냥 내버려 뒀다. 그 애가 떠드는 멍청한 소리를 듣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남자애가 성급히 움직이는 동안 송희는 차 주인이 카지노에 걸었던 것과 잃었던 것을 생각했다. 다 잃었을 때 그 사람은 홀가분했을까. 오래된 카시트에서 일어나는 먼지. 밋밋하고 물렁한 몸뚱이. 무엇을 하긴 했다고 쳐야 할지. 머쓱해하는 그 애를 두고 차에서 나올 때 송희는 녹슨 문에 무릎을 긁혔다. 차라리 그것이 선명한 감각으로 남아 있었다.

버리려면 들어야 했다. 버리는 것과 떨어뜨리는 것은 아주 달랐다.

해마다 한 번씩은 단출한 취재팀이 찾아왔다. 전교생이 반의반으로 줄어든 산골 학교에 역도부가 남아있다는 것은 꽤 이야깃거리였다. 무슨 기금인가 지원사업 덕분이라고. 그것도 다 카지노 돈이다, 라고 아버지는 말했지만 방송에서 그런 내용은 다루어지지 않았다. 푸른 산 아래 교정에 들어서며 리포터는 늘 ‘평화로운 학교, 이곳에 구슬땀을 흘리는 아이들이 있다는데요’ 라고 말했다. 곧 아이들이 내는 기합 소리와 바벨이 떨어지는 굉음으로 가득 찬 역도장 풍경. 그 즈음 메달을 딴 부원과 교장이 짧은 인터뷰를 했다. 송희는 배경에서 바벨을 짊어지고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아이들 중 하나였다. 방송은 30년 전 아시안게임에서 동메달을 땄다는 어느 선배의 자료 화면을 보여줬고, 항상 이런 자막으로 끝났다.

오늘도 미래를 듭니다.

미래의 자리에는 꿈이나 희망이 오기도 했고, 그러다 다시 미래가 오기도 했다.

내가 그런 걸 들었나.

송희도 처음에 국가대표라거나 체육대학 같은 미래를 가끔 그려보기도 했다. 그런 상상은 답장을 보낼 수 없는 먼 곳을 닮아 있었다. 운동을 게을리한 건 아니었다. 게으르지 않았기 때문에 대회를 몇 차례 치를수록 상상조차 자꾸만 쪼그라들었다. 어떤 시점에서 송희의 목표는 그냥 100킬로그램이 되었다.

왜 하필 100킬로그램이야?

젖은 머리가 그렇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것은 세 자리고… 100은 100이기도 하고… 100퍼센트의 100 말이야. 그런 생각이 있긴 했지만 이유라고 하기에는 부족했다. 굳이 이유를 대자면, 내가 그렇게 정했기 때문이야. 그건 더 이상은 어길 수 없는 약속 같은 것이었다.

일러스트레이션 김충민 기자 kcm0514@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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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희는 100킬로그램을 드는 자신을 여러 번 상상했다.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처럼 머리 위에 도착하는 바벨. 힘과 기술, 속도와 균형. 모든 게 제대로라면 1초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점수 같은 건 없다. 들었거나 들지 못했을 뿐. 심판들이 깃발을 들겠지만 사실 판정을 기다릴 필요도 없다. 받아내는 순간 알 수 있다. 선수 자신이 가장 먼저.

나는 그 100킬로그램을 오래 들고 있을 거야. 심판들이 원하는 것보다 더…. 내가 그걸 곧 버릴 거라는 걸, 버릴 수 있다는 걸 자랑할 거야. 그리고 다들 봤다 싶으면 그걸 내던질 거야. 망설임 없이, 부술 듯이 말이야.

젖은 머리가 그 다음은 뭔데, 하고 되물었다.

몰라. 소리라도 지를까.

그런 마음을 먹은 지도 긴 시간이 지났다. 감량 탓만을 하기도 어려웠다. 송희의 기록은 반 년 넘게 96킬로그램에 멈춰 있었고, 그것조차 때때로 떨어뜨렸다.

대회가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컨디션 관리를 위해 훈련은 일찍 종료됐다. 역도장 문을 닫아버렸으므로, 송희는 그냥 걸었다. 먹구름이 가득했다.

이 근방에서 카지노를 제외하면 가장 높은 건축물은 고가도로였다. 송희는 거인의 다리처럼 튼튼하고 단호해 보이는 그 콘크리트 기둥을 좋아했다. 그 아래의 딱히 이름 붙일 수 없는 공간. 개천과 덤불 사이의 버려진 의자에 앉으면 어쩐지 있어야 할 곳에 있다는 편안한 기분.

송희에게는 언제나 고가도로의 아랫면만이 보였다. 이따금 고가를 지나는 자동차 소리가 스쳤다. 그 도로가 어디로 이어지는지 송희는 알지 못했다. 정비용 철제 사다리는 아득히 높은 기둥 위로 뻗어 있었다.

나는 다이빙을 하고 싶어.

젖은 머리가 말했다.

빙글빙글 도는 거 말고. 아주 똑바로. 아주 오래.

젖은 머리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처음이 아니었다. 송희가 대꾸했다.

해 봐.

젖은 머리가 송희를 보며 말했다.

너도 같이 해주면.

송희는 아주 어렸을 때 동네 아이들에게 이끌려 계곡을 헤집고 다닌 여름날을 기억했다. 뒷산 깊숙이 들어가면 동네 교회의 십자가만큼 높은 바위가 있었다. 바위 아래는 깊고 차가운 물이었다. 버짐이 핀 아이들은 거기에서 뛰어내리는 것으로 누가 더 ‘사나이’인지를 가렸다. 여자애들은 물가에서 구경을 하며 속닥거렸다. 송희는 뛰어내리는 쪽을 택했다.

기억에 남은 건 따가운 햇살이 시야에 맺혀 만드는 하얀 반점들. 귀가 먹먹해지는 매미 울음소리. 풍덩. 검푸른 물속으로 가라앉는 잠시. 그 잠시 동안의 적막. 바닥을 찾지 못하는 발.

뜨겁게 달아오른 바위 위에서 콜록거리며 몸을 말릴 때, 앞으로 뒤로, 돌면서, 몇 번이고 더 뛰어내렸던 애들. 물 밖으로 나온 애들의 얼굴에 어린, 방금 자신이 증명한 것에 대한 자부심.

바보 같아.

송희가 말했다. 젖은 머리가 자기도 안다는 듯 대답했다.

그럼 역도는 뭐.

개천은 흐른다기보다 고여 있었다. 수면에 점점이 떨어지는 빗방울들. 풍덩. 고가도로 위에서 무언가를 버린다면. 바닥으로, 혹은 하늘로. 그럼 영화처럼 다른 세계로 가는 문이 열릴지도 몰랐다. 어머니가 말한 영광이 있는.

빗방울이 섞인 찬 바람이 불었다. 곧 쏟아질 것 같았다.

녹슨 대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서자 나무 평상에 드러누운 아버지가 있었다. 양복 재킷은 보이지 않고 셔츠 자락이 다 삐져나왔다. 술 냄새가 지독했다. 송희는 그대로 지나쳐 들어가려다 돌아섰다.

아빠. 비 와.

아버지가 뒤척이며 뭐라고 웅얼거렸다. 몸을 일으키는가 싶더니 다시 평상 아래에 주저앉았다. 색색. 아버지의 숨소리가 들렸다. 빗방울이 굵어지고 있었다.

아버지의 몸집은 만만해 보였다.

많이 나가봐야 70킬로그램 정도일 거라고 짐작했지만, 어깨에 걸어 보려고 해도, 등으로 짊어지려고 해도 아버지의 몸은 자꾸만 흘러내렸다. 그 와중에 아버지는 띄엄띄엄 사기꾼 새끼들이… 라거나 너 엄마가 옛날에… 킥킥, 하고 중얼거렸다. 송희야, 하고 부르기도 했다.

아빠. 가만히 좀 있어 봐.

차라리 아버지를 봉에 매달아 놓는다면 쉽게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마당에서 방까지 끌다시피 아버지를 옮기며 송희는 생각했다. 자기가 역도를 하며 70킬로그램 80킬로그램을 어렵지 않게 들어 올릴 수 있는 건, 오직 바벨이 바벨의 모양이기 때문임을.

불 꺼진 방에 아버지를 눕히고 나오기 전이었다. 아버지가 또 송희야, 하고 불렀다. 송희는 문간에서 아 왜, 하고 대답했다. 아버지가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역도 잘 되냐.

송희는 마땅히 할 말이 없었다. 아버지는 내 딸 아니랄까 봐 힘을 쓴다고… 하며 돌아누웠다. 잠깐의 침묵. 송희는 아버지의 등을 보며 말했다.

토요일에 대회야.

아버지는 대답이 없었다. 낮은 숨소리. 코를 고는 것도 같았다. 송희는 작은 목소리로 난 얘기 했어, 라고 덧붙이고 문을 닫았다.

송희는 다른 부원들과 함께 코치의 승합차를 타고 삼십여 분을 달렸다. 차창 밖으로 커다란 카지노 광고판 몇 개가 지나갔다. 대회가 열리는 모 군도 송희가 사는 곳과 그리 다르지 않은 풍경이었다. 통유리로 외관을 장식한 체육센터는 주변과 어울리지 않았다.

체육센터에 들어서자 가설된 경기대가 보였다. 경기대 앞에는 심판석과 귀빈석, 그리고 관중들을 위한 파란 플라스틱 의자가 네다섯 줄 놓였다. 관중석 뒤쪽으로 비어 있는 절반의 체육관에는 농구대와 탁구대, 배드민턴 네트 따위가 적당히 접혀 있었다.

가로 4미터, 세로 4미터의 경기대 한가운데에 바벨이 놓였다.

조금씩 바벨이 무거워지는 동안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선수들. 선수가 바벨을 잡으면 들거나 떨어뜨리기 전에는 모두 조용히 할 것. 어차피 금방 판명되는 일이었다.

송희는 1차 시기에서 94킬로그램을 들었고, 2차에서 96킬로그램을 떨어뜨렸다. 덜 펴진 왼팔과 밀린 발바닥. 송희는 거짓말을 했다. 느낌은 나쁘지 않았다고. 더 올려 보고 싶다고. 코치는 팔짱을 낀 채 말했다.

그래, 졸업하기 전에 한번 해 봐야지.

최종 3차 시기를 100킬로그램으로 신청했다. 송희는 몸이 식지 않도록 커다란 수건으로 어깨를 감쌌다. 대기장에 설치된 현황판을 봤다. 100킬로그램을 들어도 우승은 할 수 없었다. 안경은 1차 시기부터 110킬로그램을 신청했다. 금메달을 딴 저번 대회보다도 2킬로그램을 늘렸다. 무게 순으로 진행하기 때문에 다른 애들이 시합을 거의 마친 다음에야 경기대에 오를 것이다. 대기장 한쪽에서 안경은 몸을 덥히고 있었다. 정확한 궤적으로 떠오르는 바벨. 무수히 상상했던 깨끗한 움직임. 꽂힌 원판을 세어 보니 이미 100킬로그램이었다.

3차 시기를 위해 복도를 걸으며 송희는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오늘 역도대에 오른 건 이십여 명. 그중 십수 명은 역도화를 벗게 될 것이다. 송희는 자기가 그 십수 명 중 하나라는 걸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다만 바벨을 떨어뜨리고 끝내고 싶진 않았을 뿐.

송희는 경기대 앞 풍경을 눈에 담았다. 세 명의 심판 뒤로 양복 입은 아저씨들 몇 명이 귀빈석에 앉아 있었다. 관중석은 듬성듬성했다. 처음 보는 단체복을 입은 대여섯 명의 아이들. 보행기를 의자 옆에 둔 백발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또 이런저런 어른들. 자신이 들거나 들지 못하거나 별로 상관이 없는 사람들. 혹은 실패하기를 바랄 수도 있는 몇 명. 이 사람들이 증인이구나. 송희가 100킬로그램의 바벨로 다가설 때, 허겁지겁 장내에 들어서는 익숙한 사람.

아버지가 팔을 뻗어 손을 흔들었다.

송희도 얼결에 한 손을 들어 답했다.

아버지가 관중석 앞쪽으로 걸어왔다. 송희가 바벨을 감아쥘 때, 아버지는 귀빈석 언저리에서 누군가를 발견하고 악수를 청했다. 양복 어른이 엉거주춤 일어나 악수를 받았다. 유난히 아버지의 양복이 구겨져 보였다. 송희는 발바닥과 무릎과 허벅지와 등에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버지는 송희를 가리키며 양복에게 무어라 말을 했다. 움직이거나 말소리를 내고 있는 게 자기뿐이라는 걸 모른 채. 진행요원이 아버지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송희는 눈을 감았다.

아빠. 가만히 좀 있어 봐.

여기에는 바벨만이 있다. 나는 그걸 든다. 그리고 버린다. 버린 바벨 앞에서 나는 선 채로 경기를 끝낼 것이다. 송희는 그렇게 다짐하고 눈을 떴다.

대회가 끝나고 익숙한 동네로 돌아와, 포일을 깐 불판 너머로 송희는 아버지를 봤다. 아버지는 소주부터 한 잔 들이켠 뒤, 비계가 많은 삼겹살을 덜 달구어진 포일에 놓으며 말했다.

거의 다 들었는데. 아깝다, 그치?

송희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거의 다 드는 건 없다. 그건 그냥 떨어뜨린 것이다. 아버지는 과장된 웃음을 지었다.

울겠네 울겠어. 한 잔 할 테냐?

송희는 오늘 경기장에서 운 유일한 아이를 떠올렸다. 1차 시기에서 110킬로그램을 든 안경은 2차에서 114킬로그램도 성공해 금메달을 확정 지었다. 그대로 시합을 끝내도 되지만 안경은 혼자 3차 시기도 치르기로 했다. 119킬로그램. 성공한다면 12년 만에 경신하는 고등부 동체급 신기록이었다.

그게 자기가 아니라 남이더라도, 바벨을 떨어뜨리는 건 어쩐지 보기 싫었다.

대기장에서 송희가 짐을 다 쌌을 때, 3차 시기를 마친 안경이 눈이 빨개져서 돌아왔다. 그쪽 코치가 기록은 대학부에 가서도 얼마든지 세울 수 있다고 다독였다. 대기장의 역도대 위에서 녀석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송희는 떠나기 전 그 애 앞에 멈추어 섰다.

그만 울어.

안경을 벗고 울던 그 애가 흐릿한 눈으로 송희를 봤다. 송희는 다시 말했다.

넌 잘했어.

아버지가 소매를 걷어 올리고 고기를 집게로 뒤적거렸다. 옛날에는 목구멍에 탄가루 씻는다고 이 비계를 먹었단 말이지. 이게 적당히 먹으면 건강에 좋아. 체력을 키워서 다음엔 이겨야지, 같은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이긴다고. 송희는 역도에 그런 게 있었는지 생각했다. 축구나 격투기라면 ‘이겼다’, ‘졌다’고들 하지만…. 따지자면 나는 94킬로그램만큼 이겼고 100킬로그램만큼 졌지. 안경은 114킬로그램만큼 이겼고, 119킬로그램만큼 졌어. 더 무거운 걸 버릴 때 더 기쁘다면, 더 무거운 걸 떨어뜨리면 더 화날까.

역도 그만할까 봐.

송희가 말했다. 아버지가 충분히 익지도 않은 고기를 송희 앞으로 밀어 놓았다. 자기도 집게로 한 점을 집어 입에 욱여넣었다. 뜨거운 고기를 씹느라 볼을 실룩거리며 아버지가 말했다.

아까 군청 사람을 만났는데 말이야.

아버지는 소주를 들이켜며 말을 이었다. 카지노에 가족끼리도 놀러 간다는 먼 나라. 늘어나는 관광객들을 위해 지어질 도로와 호텔. 동네가 탄광문화관광촌으로 개발되면 치솟을 땅값. 국회의원으로부터 도의원, 군의원들로 이어지는 낯선 이름들. 그래서 결국 군청의 아무개 계장이 아버지와 몇 촌이며 항렬이 어떻게 되는지. 그래서 송희 너는 앞으로 무엇을 배워두면 좋은지….

송희는 아버지의 야윈 팔뚝을 보았다. 검댕이 묻은 작업복을 입고 작업화를 신었던 옛날. 저 팔뚝으로 정말 깜깜한 땅속에서 돌덩이를 내리쳤을까. 탄차를 밀고 포대를 짊어지고 어머니를 안았을까. 그리고 나를 들어 올렸을까. 송희는 눈앞의 사람이 버린 것과 버리지 못한 것을 가늠해 보았다.

송희는 물었다.

근데 아빠는 몸무게가 몇이야?

송희가 그날로 역도를 아주 그만둔 것은 아니었다. 대회 후에도 송희는 매일의 훈련에 성실히 참여했다. 감량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기록은 늘지 않았지만 들 수 있는 만큼 들고 버릴 수 있는 만큼 버렸다. 입김이 나오네, 하다가 길에서 어묵을 사 먹고 자신에게 목도리를 선물했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던 어떤 날에는 아버지를 들어 옮기는 조금 더 효율적인 자세를 알아냈다. 취업률이 좋다는 광고를 보고 가까운 전문대학에 지원해 합격했다. 인원 미달이었다.

바벨을 마지막으로 잡은 건 졸업식을 앞둔 겨울방학의 어느 날이었다. 눈 내리는 오후. 부드럽지만 미약한 빛이 아무도 없는 역도장에 스며들어 있었다.

송희는 역도대 위에 가만히 두 발바닥을 붙였다.

빈 봉을 몇 차례 쏘아 올렸다. 원판을 하나둘 꽂았다. 금속이 울리는 소리가 맑았다. 몸이 가벼웠다. 원하는 만큼 빠르게, 원하는 만큼 강하게 움직일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 침침한 벽에 기대어 젖은 머리가 말했다.

방해하는 사람은 없어.

그래. 사실 언제나 없었지. 적어도 역도대 위에서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도 말리지도 않았어. 송희는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들었거나, 내가 들지 못했을 뿐.

이상하게 말이야.

송희는 그렇게 말하며 바벨에 원판을 더 꽂았다. 그것은 100킬로그램이 되었다.

이제 아무도 밉지가 않아.

송희는 바벨 앞에 섰다. 창밖에서 떨어지는 굵은 눈송이들이 시멘트 벽면에 점점이 그림자를 만들었다. 천천히 내려앉는 것들. 그리고 아주 오래 그곳에서 조금씩 바랜 문장.

오늘의 무게가 내일의…

송희는 단호해졌다. 아니. 이것은 영광이 아니야. 이것은 미래도 아니고 꿈도 희망도 아니야.

그럼 뭐야?

젖은 머리가 물었다. 송희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변하지 않는 것. 흥하지도 망하지도 않는, 값이 오르지도 내리지도 않는, 운이 좋아도 나빠도 그대로인 것. 어떤 비유도 아니고 상징도 아닌, 말하자면 그냥 100킬로그램의 손때 묻은 쇳덩이.

나도 몰라. 어쨌든 들 거야.

송희는 바벨을 쥐었다. 딱딱하고 차갑다. 하지만 내 손안에 있는 내 것. 내 몫의 약속.

등 뒤에서 젖은 머리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그럼 내가 증인이 될게.

다시 땅에 붙인 두 발바닥. 송희는 두 발 아래 깊이 묻혀 있는 검은 돌들을 떠올렸다. 시간과 열기와 압력 속에서 태어나 빚어진 것들. 그로부터 시작된 분화. 아득히 오래전부터 솟구친 힘이 마침내 도착하는 정확한 자리. 송희는 숨을 참았다. 굳게 잠긴 복부 안에서 작고 단단한 무엇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뜨거워. 나 지금 뜨거워.

쇳덩이를 쥐고 두 발로 바닥을 밀어내는 순간.

눈 내리는 겨울 오후의 고요. 산등성이의 헐벗은 자리. 교정의 새파란 인조 잔디. 철교와 고가도로. 박물관 앞에 전시된 녹슨 탄차. 모텔과 마사지숍의 현란한 입간판. 주인 없는 자동차들. 모두가 공평하고도 아늑하게 하얀 눈에 덮여서, 미처 닿지 않는 그늘에서도 단정한 마음으로 목도리를 여밀 수 있었던 날. 왼발 오른발을 눈밭에 디디며 빙판과 진창의 시간을 예비하던 긴 겨울의 한가운데.

그날이 송희가 정말로 역도를 그만둔 날이었다.

● 당선소감
그저 감사한다… 힘 닿는 한 멀리까지 가겠다

김기태 씨
김기태 씨
신춘문예 당선은 무엇을 증명하지도 약속하지도 않는다. 그래도 기쁘다. 인생은 어렵고 문학은 소중했으며 내가 열심히 썼다는 이야기는 생략하고, 감사 인사에 분량을 할애하겠다. 나는 마음을 전하는 데에 늘 인색하고 서툴렀다. 귀한 지면이므로 안 하던 짓을 해보려한다. 기꺼이 상투적으로. 또 감상적으로.

나는 합평 낭인처럼 여러 수업을 떠돌았다. 뵈었던 순서대로 김현영 김성중 서유미 해이수 하성란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짧은 인연이라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필요한 때에 정확한 이정표를 세워 주셨다. 심사위원님들께도 큰 은혜를 입었다. 데려다주신 곳으로부터, 힘닿는 한 멀리까지 가겠다.

합평 동료들. ‘어? 나 이 사람 아는데’ 하고 계시는 바로 당신에게서 나는 배웠다. 그저 감사한다. 현재 함께하는 민경 유경 치규 이연 다운 님께는 수줍은 하이파이브를 요청한다. 아무래도 이 모임에는 행운 요정이 숨어 있는 듯하다.

친구들. ‘갓 태어난 아기가 주먹을 쥘 수 있어?’와 같은 맥락 없는 질문에도 늘 성실히 답해 줬던 고멘저스와 곽엄윤. 비밀스러운 독자 민성과 오랜 동지 승훈. 나는 여러분과의 가늘고 긴 우정을 꽤 좋아한다.

가족들. 내가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받은 건 많고 돌려준 건 없다. 싹싹하게는 못 해도 도리는 지키고 싶다. 특히 안경숙 님과 김진열 님의 행복에 더 기여하겠다.

그리고 내가 모르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손. 시끄러운 공장에서 각봉투 접는 기계를 조작한. 우편물을 가득 싣고 오토바이 핸들을 쥔. 수백 개의 봉투를 뜯고 원고를 복사한. 그 손들을 생각한다. 한참 늦은 저녁에 겨울바람과 함께 귀가해 그 손으로 뜬 음식이 따뜻했길 바란다.

△1985년 강원 원주시 출생 △고려대 언론학부 졸업




● 심사평
처음부터 끝까지 단숨에 읽히게 만들어
성석제 씨(왼쪽)와 오정희 씨.
성석제 씨(왼쪽)와 오정희 씨.
본심에 오른 소설을 통독하면서 느낀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의 창궐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삶의 어두운 풍경이 소설을 통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현실을 상징하고 은유하는 새로운 소재를 찾고 공유하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는 데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소설은 감정과 경험의 미디어로서 새롭게 출현하는 작가들에 의한 진화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회포’는 아이를 두고 갈등을 겪고 있는 부부 간, 시부모와 며느리 간의 차이와 대치를 예리하게 보여줬다. 지금 이 시대의 가치관과 고민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단편소설이 가진 강점이 잘 드러난다. 다만 문장이 문어체인지 구어체인지 명확하지 않고 일관성이 부족하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유리의 미래’는 밤과 새벽에 대리운전을 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정교하게 그렸다. 인물들이 표면적인 특성만 두드러질 뿐 내면의 모습이 충분히 드러나지 않아 입체감이 부족하다는 게 아쉬웠다. 인물의 개성이 지나치게 강조되다 보면 독자가 인물과 공감할 여지가 줄어든다는 것도 생각해 보기 바란다.

당선작 ‘무겁고 높은’은 근래 보기 드문 강력하고 단단한 작품이다. 역도, 카지노가 들어선 탄광촌의 현실, 성장통 등 단편소설 한 편에 담기 힘든 여러 소재를 끌어들였음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단숨에 읽히게 만드는 흡인력이 돋보인다. 기울어가는 햇빛 속에서 추위를 견디며 생존을 이어나가야만 한 사람들, 옅은 희망과 암담한 현실 속에서 성장해가는 한 인간의 모습을 세밀하게 잘 담아냈다. 자칫 어수선할 수도 있는 풍경을 탄탄한 문장과 서술을 통해 정돈해 나가는 솜씨가 범상치 않은 작가의 출현을 예고하는 듯하다.

오정희·성석제 소설가


#동아일보#신춘문예#단편소설 당선작#무겁고 높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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