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선 소감이라는 것을 쓰려니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생각이 듭니다. 궁금하지 않으실 글쓴이의 고백을 더해보겠습니다. 저는 항상 시가 무섭다고 말하고 다녔습니다. 저만 빼놓고 자기들끼리만 아는 말로 속닥거리는 그것들이 자주 무섭고 서러웠습니다. 시를 읽다가 넘어질 때면 메모지를 열어 받는 사람이 없는 편지를 썼습니다. 작년 4월 13일에 쓴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저는 이 해독 불가능한 세계에 어쩌다 들어오게 된 것일까요.”
이쯤 되면 저의 고백을 이상하다고 느끼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저는 여전히 시가 무섭다는 생각을 합니다. 나만 빼놓고 자기들끼리만 아는 말로 즐겁고 불행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만약 저를 조금이라도 끼워줄 생각이 있다면, 언제나 이미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들을 변호할 뿐이라는 마음으로 쓰겠습니다.
흔치 않은 이런 기회에 이름을 불러보고 싶은 사람들도 아주 많이 있습니다. 그 이름들을 다 적는다면 주어진 분량이 부족할 것 같습니다. 먼저 윤빈, 욧버 그리고 온유에게 나를 살려주어 고맙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처음으로 최선교가 될 수 있었던 펜통, 갈 데 없던 그곳에서 서로를 알아본 살루스와 모교회 식구들은 구원이라는 말에 어울립니다. 문학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오형엽 교수님과 함께하는 대학원 동료들에게도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엄마, 아빠, 언니도 생각납니다. 저는 언제나 사랑과 우정을 먹고 꾸역꾸역 살아가는 중입니다.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1996년생 대전 출생 △한동대 국제어문학부 졸업 △고려대 국문과 현대문학 석사과정 재학 중
● 심사평 텍스트에 밀착… ‘시의 윤리’ 찾으려고 애써
비평이란 무엇이고 또 어떠해야 하는가. 그야말로 새삼스럽고 촌스러운 질문일 테다. 하지만 여전히 답하기 쉽지 않은 이 오래된 질문이 우리에겐 아직도 궁금한 미완의 숙제다. 응모작들을 읽으면서 비평에 대한 이런 상념들이 앞섰던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비평을 찾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평은 텍스트를 선정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지금 현재 무엇이 의미 있는 텍스트인가를 분별해내고 그 텍스트를 분석해 그것이 놓인 자리가 정확히 어디인가를 판정하고 헤아리는 안목. 대상에 대한 비평적 거리를 확보하면서도 대상이 발화하는 목소리에 겸허하게 귀를 기울이는 태도. 그 결과를 정확한 언어로 표현하고 전달하는 소통의 기술. 새롭게 비평의 길에 들어서려는 예비 비평가들의 글에서 보고 싶었던 것은 비평의 기본에 속하는 이런 덕목들이었다. 아쉽게도 비평적 거리 혹은 객관성이나 소통의 의지를 갖추지 않은 글들이 다수였고 의미 있는 비평적 질문을 품고 있는 글들도 보기 힘들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나’가 ‘그것을’ 말할 때―안희연론’은 많은 글들에서 보이는 그런 결함들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었다. 텍스트에 밀착해서 ‘시’의 윤리를 찾아내려고 노력하는 비평적 분투가 눈에 보였고 자기 나름의 언어로 시를 풀어쓰는 유려한 문장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면서 시인 안희연의 자리를 정확하게 배치하는 안목도 갖추고 있었다. 아직은 서툴고 깊지 않고 독자와 소통하려는 의지도 채 여물지 않았지만, 심사위원들은 아직은 서툰 그 가능성을 믿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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