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각자의 방식으로 시대를 반영한다. 나는 켄 로치의 방식이 좋았다. 좋아서 더 봤고 더 읽었다. 읽다 보니 쓰고 싶어졌다. 쓰는 순간엔 호기로웠고 쓴 끝은 부끄러웠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원고를 보냈다. 그건 켄 로치를 기억하기 위한 나만의 작은 의식(儀式)이었다.
당선 소식은 잔잔한 물 위에 던져진 조약돌처럼 나의 일상에 달려와 부딪쳤다. 미처 대비하지 못한 부딪침이라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 달라진 것은 없다. 나의 일상은 변함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일상 속에서 나는 켄 로치의 영화가 남겨준 과제를 하나씩 풀어갈 것이다.
졸고를 손에 쥐고 막막하다 여기셨을 심사위원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진주알 같은 순간을 함께한 친구와 불민한 제자를 참고 기다려주시는 선생님께도 감사드린다. 무엇보다도 언제나 내 삶을 응원해주시는 부모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1991년 부산 출생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졸업
● 심사평 새롭게 다가온 영화, 새로운 접근 ‘신선’
‘켄 로치―영화적 실천의 가능성’을 읽고 느낌이 왔다. 모처럼 제대로 된 비평을 만난 것 같았다. 다큐멘터리는 현상-전시, 즉 현상을 통해서 현실을 드러내는 것이 가능한 장르라고 한다면 픽션영화(극영화)는 현상을 모방한다. 켄 로치 감독은 역설적이게도 극영화를 통해서 현상-전시를 추구해 왔다. 그렇다면 어떻게 영화적 실천이 가능한가. 그는 보여주기를 통해서 일상을 재현하고, 재현된 환부를 통해 고통을 보여주려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이중의 차단 벽이 필요하다. 감독은 양자의 관객 사이에 차단 벽을 설치해 주인공의 삶에 개입하는 것을 막는다. 그리하여 그의 영화는 두 번의 패배를 거칠 수밖에 없다.
로치의 영화에서 차단 벽 내의 등장인물들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 첫 번째 패배다. 또 그의 영화가 재현하고 있는 외적 현실은 여전히 바뀐 것이 없다. 차단 벽 너머의 관객은 그저 방관만 할 뿐이다. 두 번째 패배다. 이처럼 영화적 실천은 늘 미완으로 남는다.
그렇다면 왜 그는 영화를 만들고 있는 것일까. 그는 이중의 차단 벽 속에서 실패를, 즉 무수한 넘어짐을 기록하고 그저 폭로할 뿐이다. 그리하여 그의 영화를 사랑하는 관객이 해야 할 일은 한 가지인데, 그를 기억하는 것이다. 이처럼 요약할 수 있는 평자의 글에서 본 심사자는 로치의 영화적 실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읽을 수 있었다. 이 밖에도 영화 ‘미나리’와 ‘노매드랜드’ 등을 다룬 몇 편의 뛰어난 평문들도 있었으나 이 글의 치밀성을 넘어서기에는 다소 부족했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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