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 10월,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를 지낸 버트런드 러셀의 연구실로 22세의 앳된 공대생이 들이닥쳤다. 러셀은 순간 당황했지만 애잔한 생각이 들었다. 가을학기 내내 자신을 쫓아다닌 학생에게 러셀은 “유체역학을 관두고 내게 배우라”고 권유했다. 학생의 이름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명언을 남긴 불세출의 철학자다. 현대철학의 두 거인을 사제관계로 엮어준 건 철학이나 문학이 아닌 유체역학이었다.
고대 그리스부터 20세기까지 약 2500년에 이르는 과학사의 중심에는 유체역학이 있었다. 저자는 한국형 발사체 ‘누리호’ 로켓 엔진의 핵심 부품을 개발한 공학자다. 그는 1990년대 학부생 때부터 이 책의 뼈대가 된 글을 써내려갔다고 한다. 전공서에 적힌 수식보다 이를 만들어낸 이들의 삶이 궁금해서였다. 30년간 쌓아온 노력의 결실 덕분일까. 만담꾼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듯 과학사를 흥미롭게 풀어냈다.
저자는 “과학의 역사는 곧 유체 소멸의 역사”라고 평하면서도 실패로 끝난 유체역학 실험에 경의를 표한다. 1880년대까지만 해도 유체역학의 과제는 ‘에테르’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이었다. 아이작 뉴턴을 비롯한 고전 물리학자들은 빛이 입자로만 이뤄져 있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이들의 이론에 따르면 중력이 존재하지 않는 진공에서 입자인 빛은 나아갈 수 없었다. 하지만 빛은 진공의 우주공간에서도 나아간다. 19세기 유체역학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가상의 유체인 에테르 개념을 고안했다. 중력을 전달하는 에테르를 통해 빛이 직진한다는 것.
하지만 20세기 들어 에테르 개념은 불필요해졌다. 빛이 입자인 동시에 파동이며, 진공에서도 불변의 속도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를 실험으로 규명한 물리학자는 유체역학을 전공한 앨버트 마이컬슨이다. 저자는 마이컬슨에게 1907년 노벨 물리학상을 안긴 이 실험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실패”라고 평했다. 비록 에테르를 증명하려던 실험은 실패했지만 양자역학 같은 현대물리학이 싹틀 수 있었다.
유체역학을 둘러싼 담론은 물리학을 넘어 다양한 학문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전자의 이동을 전류(電流)라고 명명한 게 대표적이다. 유체역학을 공부한 비트겐슈타인과 절친했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유체역학의 ‘유동성’ 개념을 경제학에 도입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본래 회전을 뜻하는 레볼루션(revolution)이 혁명을 의미하게 된 것도 유체역학에 밝았던 철학자 볼테르와 몽테스키외가 지동설의 지적 충격을 혁명에 빗댄 데 따른 것이었다. 당대 예술에 끼친 영향도 지대했다. 르네상스 시대 화가 보티첼리는 ‘비너스의 탄생’에서 여신의 머릿결을 유체역학의 핵심 주제인 ‘소용돌이’로 표현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무수히 많은 소용돌이 스케치를 남겼다.
이 책에 나오는 각계 지식인 500여 명은 유체역학을 통해 서로 연결된다. 어쩌면 학문의 경계를 뛰어넘은 지식인들의 교류야말로 우리가 이어가야 할 과학사의 유산 아닐까.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교류’의 단어 뜻에도 ‘근원이 다른 물줄기가 서로 섞여 흐른다’는 유체역학 개념이 담겨 있다. 우연의 일치만은 아니다. 고대 그리스어로 ‘모든 것은 흐른다’는 뜻을 지닌 책 제목(판타레이)처럼 모든 지식은 흐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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