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츠러든 왼팔과 곱사등을 가졌지만 왕가의 혈통을 지닌 자. 목숨을 바쳐 싸웠지만 사랑도 인정도 받지 못한 사람. 아무도 돕지 않기에 스스로를 돕기로 작정한 인물. 형과 조카들을 살해해 왕위에 오르는 영국 요크가의 마지막 국왕 리차드 3세를 주인공으로 한 셰익스피어 희곡 원작의 연극 ‘리차드3세’가 11일 개막했다.
배우 황정민이 연기하는 리차드는 왕관을 지키기 위해 어떤 윤리적 한계도 단숨에 뛰어넘어 내달리는 인물이다. 그런데 이 악인(惡人), 조금 독특하다. 독백과 방백을 통해 리차드의 속마음을 듣는 관객은 그를 마냥 미워할 수 없게 된다.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자기 행동을 합리화하거나 포장하는 법이 없다. 스스로 악한 줄 아는 악인이다. “비뚤어진 게 아니라 뒤틀린 것”이라 할 뿐, 위선자나 파렴치한은 아니다. 콤플렉스로 똘똘 뭉친 리차드는 가족도 부하도 믿지 못한 채,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벌인다. “충성을 맹세하는 자보단, 황금을 믿는 자가 더 낫지.” 그래서일까. 이 악인의 추락이 마냥 통쾌하지 만은 않다.
셰익스피어의 언어 위에 탄생한 대사들엔 강한 여운이 남는다. “악을 택하고 선을 그리워하는 편이 낫다” “악행은 내가 저지르고 통탄할 책임은 남에게 미루는 방법” “나의 죄를 묻는 그대들의 죄를 묻고자 한다.” 무대 위에서 오가는 대사들이지만 무대 밖 관객도 마냥 마음 편히 듣기 힘든 내용들이다.
불구를 연기하는 황정민의 집요함은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검지와 중지를 구부린 왼손은 망토 안에 잠시 숨겨진 순간에도 펴지는 법이 없다. 절뚝이는 걸음걸이도 흔들림 없다. 황정민의 존재감이 워낙 압도적이라 다른 인물엔 눈길이 가지 않는다는 점은 아쉽다. 하지만 요크가에 멸문지화를 당한 마가렛 왕비를 연기한 정은혜의 한(恨) 서린 ‘소리’는 살아남는다. “그대들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아는가?” 극중 인물들 그리고 관객을 향해 울부짖는다.
극의 기승전‘결’은 커튼콜에 이르러서야 완성된다. 100분간 구부정한 허리와 뒤틀린 다리로 무대를 휘젓던 리차드가 무대 뒤로부터 발소리를 내며 거칠게 달려 나오다, 무대 끝에선 허리를 들어올려 꼿꼿한 자세로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돌아온 배우 황정민. 벌게진 얼굴엔 격정과 환희, 감격이 스친다.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일 때 관객들은 비로소 연극이 끝났음을 실감한다. 다음 달 13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4~9만 원, 14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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