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글래디에이터’(2000년) 중 주인공 막시무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대화다. 로마 변경 히스파니아(스페인 및 포르투갈) 출신의 장군 막시무스가 가족을 떠나 게르마니아 정복전쟁에 나선 건 오로지 로마의 영광을 위해서였다. 로마 점령 직후 어쩌면 노예가 됐을지 모를 속주민 출신이 ‘팍스 로마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충성한 것이다. 이유가 뭘까. 그것은 3세기 무렵 모든 속주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한 정책과 관련이 깊다. 재판을 거치지 않고는 공권력에 의한 처벌을 금지한 시민권의 확대는 로마제국 성립에 필수였다.
역사학, 법학, 문학, 건축학 등을 전공한 8명의 학자가 공저한 이 책은 그리스, 로마시대 시민의 의미를 다각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단순히 공자 왈 맹자 왈만 하는 게 아니라 고대 시민의 개념이 자유민주주의를 구가하는 현대에 어떻게 재해석될 수 있는지도 보여준다.
저자에 따르면 고대 아테나이(아테네)에서 가장 핵심적인 시민의 권리는 누구나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는 뜻의 ‘파레시아(parrhesia)’였다. 현대 개념으로는 언론의 자유에 가까운 파레시아는 정치, 경제, 법률, 복지 등 모든 사회영역에서 개인의 권리를 확보하는 데 필요한 기본권이었다.
문제는 플라톤의 지적대로 악한 시민이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파레시아를 행사할 때 사회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기원전 415년∼기원전 413년 아테네가 시켈리아 원정을 놓고 의견 대립이 벌어졌을 때가 대표적이다. 아테네의 유명 정치가였던 알키비아데스는 선제공격의 이점을 들어 원정을 주장한 반면 니키아스는 위험성을 이유로 반대했다. 결국 알키비아데스의 주장대로 아테네군은 원정에 나서지만 정작 사령관을 맡은 그는 적국 스파르타로 넘어간다. 본국에서 제기된 재판도 원인이었지만 나중에 페르시아로 다시 망명해 그리스 전역에 해를 끼친 행위로 미뤄볼 때 그의 파레시아는 진정 공익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게 저자의 결론이다. 권력을 얻기 위해 포퓰리즘 연설을 쏟아내는 21세기 정치인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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