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살려야 할 의학이 그 반대로 활용됐다면? 말도 안 된다고 여겨지는 일이 2008년 이탈리아에서 벌어졌다. 외과의사 파올로 마키아리니는 유명 의학저널 ‘랜싯’에 기관지를 성공적으로 이식했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후 그는 환자 8명에게 인공 기관지 이식 수술을 추가 집도했고, 그 결과 환자들의 상태가 호전됐다는 논문을 7편이나 내놓았다.
이는 모두 거짓이었다. 마키아리니가 수술한 환자 대부분이 부작용으로 사망하자, 이들을 돌봤던 의사들이 의문을 제기했다. 마키아리니를 고용하고 연구를 지원했던 카롤린스카기술대는 수술과 논문 작성에 어떤 위법행위도 없었다며 그를 비호했다. 하지만 합병증으로 고통 받는 환자들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보도되면서 대학도 조사에 착수했다. 그 결과 마키아리니는 환자 상태를 조작했고, 쥐를 대상으로 한 기관지 이식 실험 데이터를 위조한 것으로 드러났다.
획기적인 발견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과학자들이 연구 결과가 거짓이었음을 시인하며 카메라 앞에서 고개 숙이는 모습을 심심찮게 본다. 영국 심리학자인 저자는 마키아리니의 사례처럼 데이터를 누락하고, 사진을 조작해 성과를 부풀리는 경우가 과학계에 팽배하다고 폭로한다. 과학계 최고 수준의 저널인 ‘네이처’ ‘사이언스’에 게재된 논문 중에서도 데이터 조작 등 연구 부정행위로 한 해에 수백 편의 논문이 철회되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유명 과학자들도 조작의 유혹을 피해갈 수 없었다. 간수 역할의 피실험자가 죄수 역할의 피실험자를 학대하게 되는 결과를 도출한 필립 짐바르도의 ‘스탠퍼드 감옥 실험’은 심리학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연구로 꼽히지만 수십 년이 지나서야 민낯이 드러났다. 짐바르도가 실험에 간수 역할로 참여한 이들에게 어떻게 행동할지 상세한 지침을 준 녹취록이 공개된 것이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가 2004년 인간 배아 복제에 성공했다는 논문을 ‘사이언스’에 발표했다가 세포 사진을 조작한 사실이 발각돼 바닥으로 추락한 사건은 한국 과학계의 수치로 남아 있다.
저자는 조작을 통해 결과를 부풀리려는 욕망이 과학계의 ‘출판 편향’에 기인했다고 지적한다. ‘과학문헌은 과학 과정에서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한 철저한 기록이어야만 하는데, 과학 문헌 역시 신문처럼 새롭고 흥미로우며 명확한 주제가 있는 스토리를 편애한다’는 것이다. 저널 편집자와 논문 검토자들은 연구 결과가 얼마나 흥미로운가에 따라 논문 게재 여부를 결정한다. 이를 과학계에서는 출판 편향이라고 부른다. 그 결과 긍정적인 결과만 인정되고 무효로 나타난 결과는 서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런 현실을 바꿀 수는 없을까. 저자는 방법론이 타당할 경우 결과와 상관없이 논문을 게재해 주는 저널을 만드는 방안을 제안한다. 논문 출판의 모든 과정에 대해 누구든 접근할 수 있도록 연구에 사용된 데이터, 데이터 분석에 사용된 통계 프로그램의 코드 등을 공개하는 ‘오픈 사이언스’도 방법이 될 수 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식음을 전폐하고 연구만 하던 과학자가 종이뭉치를 들고 뛰쳐나와 ‘유레카!’를 외치는 것이 유의미한 발견이라는 생각이 오랜 기간 과학계에 뿌리내렸다.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당장은 덜 흥분되더라도 제대로 된 방법론을 거쳐 견고한 결과를 도출하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대부분의 과학은 갑자기 결론적 진리로 도약하기보다는 점진적으로 누적되는 성격을 띤다. 그래서 과학은 원래 지루한 학문이었다. 그리고 과학은 결국, 다시 지루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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