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선 도색 페인트로 그림을 그렸더니 나타난 효과[영감 한 스푼]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2월 5일 11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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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도 때로는 감성이 아닌 기술로 승부를 본다
필터 없이도 반짝이는 물감을 만들어 컬렉터를 사로잡은 메리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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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민 기자입니다.

독자 여러분 즐거운 연휴 보내셨나요?

오늘은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는 미국의 여성 작가 메리 코스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아모레미술관은 지난해 바바라 크루거에 이어 다소 개념적인 여성 작가의 개인전을 선보이고 있는데요.

저는 메리 코스에 대해 수 년 전 영국 디자이너 듀오를 인터뷰하며 이야기를 들었고, 실제로 작품이 어떨지 궁금해서 전시장을 직접 찾게 되었습니다.

첫 느낌은,

“아니, 그림 속에 내용이 없어 보이는데 이렇게만 해도 인기가 있다고?”(미니멀리즘 예술이 1960년대에 그렇게 많았는데 굳이? 그렇다고 네오 라우흐 같은 트렌디한 작품도 아닌 것 같은데?)

이랬고요. 그림을 가까이 보고 찬찬히 보다보니 그 다음엔 ‘아 미국 작가답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메리 코스
메리 코스
그 이유는 메리 코스가 캔버스 위에서 독특한 효과를 내는 ‘기술’로 승부를 보았기 때문인데요.

오늘은 기술이 어떻게 창의성을 발휘하는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영감 한 스푼 미리 보기: 기술로 입증한 예술
메리 코스 개인전

1. 메리 코스는 ‘미니멀리즘’ 예술 트렌드에 적절한 시기에 뛰어들었다.

2. 그러나 미학 저술을 직접 발간해 자신만의 철학을 입증한 도널드 저드나 대형 설치 미술로 공공의 이목을 이끈 리처드 세라 같은 작가들에 비하면 차별화되는 요소가 부족했다.

3. 그런 가운데 기술적으로 미니멀리즘을 구현하는 자신만의 방식을 고안해 냈고, 이것이 컬렉터에 어필 돼 작업 세계를 이어가고 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반짝이는 그림
메리 코스, 무제(흰 빛 시리즈), 1994년
메리 코스, 무제(흰 빛 시리즈), 1994년
위 사진이 여러분이 전시장에 가게 되면 가장 많이 마주하게 될 풍경입니다. 그런데 사진으로는 담을 수 없는, 직접 가서 봐야만 보이는 이 그림의 특징이 있는데요.

사진 속 작품은 마치 물결이 일렁이듯이 아래에서부터 흰 빛이 올라오고 있지요.

먼 발치에서 작품을 보면 그냥 흰 띠가 세로로 늘어서 있는 다소 심심한 모습이 보입니다.

이 작품의 반전은 보는 사람이 그림 앞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 생겨납니다.

보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 밝기가 달라지는 그림의 모습
보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 밝기가 달라지는 그림의 모습
네 이렇게 표면은 매끄러워 보이지만 이리저리 걸음을 옮기면서 확인해보면 마치 차가운 금속성 재질의 무언가에 빛이 반사되는 것 같은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메리 코스의 그림은 표면에 울퉁불퉁한 미세 입자들이 빛을 굴절시켜 보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 다르게 반짝이는 것이 특징입니다.

저는 인스타그램이나 틱톡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글리터’ 효과가 떠올랐답니다.

중요한 것은 메리 코스가 그림에 ‘왜 이런 효과를 넣어서 자신의 창의성을 입증하려 했느냐’겠죠.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자세히 해보겠습니다.

현상학과 맞물린 예술, 미니멀리즘
메리 코스의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보는 사람’입니다.

보는 사람이 어디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그림의 색과 모양이 바뀐다는 것이 흥미로운 부분인데요. 이러한 요소는 196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나타났던 미니멀리즘 예술의 가장 중요한 철학입니다. 미니멀리즘 대표 작가 도널드 저드의 작품을 볼까요?

도널드 저드, 무제, 1991년.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도널드 저드, 무제, 1991년.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위 사진은 미니멀리즘 예술의 대표적인 작가 도널드 저드의 설치 작품을 담고 있습니다. 저 작품을 마주하면 여러분은 어떤 기분이 들 것 같나요?

아마도 이런 반응들이 많을 듯합니다.

“이게 뭐야. 무슨 모양이지?”

“나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이게 예술 작품인거야?”

그런데 놀랍게도 예술 작품이 맞고요. 저드의 작품은 수백억~수천억 대를 호가합니다.

제작 공정을 따지면 미술의 역사상 가장 가성비 높은 작품 중 하나가 아닐까 싶은데요.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이 담고 있는 저드의 생각입니다.

아마 이 작품의 의미를 물으면 저드는 이렇게 답할 것입니다.

도널드 저드
도널드 저드
정해진 의미는… 없고요. 그냥 여러분이 보는 대로 받아들이세요.

제가 조금 단순하게 정리했지만 이 말은 20세기 인간의 사상사의 중요한 단면을 담고 있습니다. 바로 ‘현상학’의 등장입니다.

현상학이 등장하기 전까지, ‘의미’라는 것은 신이나 왕이 정해주는 것이었지요.

평범한 사람들은 신이 가르치는 대로, 왕이 명령하는 대로 가치가 정해진 세계 속의 부속품이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개개인의 인식이 중요해지면서 각 개인이 자신에게 중요한 의미를 정하고 결정하며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 지금의 세계입니다.

예술에서도 마찬가지로 과거로 갈수록 신과 왕의 뜻이 중요했죠.

그 다음 단계로 작가들이 신과 왕을 버리고 ‘예술가의 의도’를 강조했다면, 미니멀리즘 예술가들은 이 의도까지도 지워버립니다.

프랑스의 비평가 롤랑 바르트가 문학 작품은 작가가 의도한 산물이 아닌, 받아들이는 사람의 반응에서 의미가 생긴다고 ‘저자의 죽음’을 통해 말했듯이 미니멀리즘 예술가들은 ‘예술가의 죽음’을 선언한 것이지요.

조금 복잡한 이야기였습니다만. 간단히 말하면 예술가가 정해주는 대로 작품의 의미가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의 마음 속에서 생겨나는 반응이 그 작품의 가치와 의미를 정한다.

즉 “여러분이 주인공입니다!!”라는 위대한 선언을 예술사에서 처음으로 이 작품들이 의식적으로 한 것입니다.

따라서 도널드 저드의 작품은 현대미술을 다루는 공공 미술관이라면 어디나 한 점씩은 소장하고 싶어합니다.

인간사의 중요한 변화를 담은 예술 작품을 시민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공공의 이익에 부응하는 미술관의 역할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작품의 개수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저드의 작품 가격이 치솟는 이유입니다.
메리 코스의 차별화 전략
메리 코스, 파란색 팔각형, 1964년, 캔버스에 금속 조각이 혼합된 아크릴릭
메리 코스, 파란색 팔각형, 1964년, 캔버스에 금속 조각이 혼합된 아크릴릭
위와 같은 맥락 속에서 메리 코스의 작품을 다시 한 번 볼까요.

우리가 예술 작품을 볼 때 중요하게 봐야할 것 중 하나는 바로 ‘제작연도’입니다.

이 작품이 내눈에 아무리 예쁘고 좋다고 해도 그것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면 보편적으로 가치를 입증 받기가 어렵기 때문이죠.

메리 코스의 위 작품은 1964년에 제작되었죠. 이 연도가 중요한 것은 현상학과 맞물린 미니멀리즘 예술이 태동하던 1960년대에 그녀도 발을 담그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작품이 1980년대, 2000년대에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냥 예쁘지만 역사적인 의미는 없는 키치 작품 중 하나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메리 코스, 무제(두 겹의 빨간 아치), 1998년
메리 코스, 무제(두 겹의 빨간 아치), 1998년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그녀가 나름의 차별화를 시도했다는 점입니다.

코스의 작품 대부분은 ‘유리 마이크로스피어가 혼합된 아크릴릭’을 재료로 하는데, 이것이 그녀만의 전략이었습니다.

캘리포니아 출신인 코스는 석양이 비치는 도로에 차선이 반짝이는 것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합니다.

즉 운전자가 차선을 잘 볼 수 있도록 물감에 ‘유리 마이크로스피어’라는 물질을 섞는데, 이것을 그림에 활용하기로 한 것이죠.

그 결과 ‘보는 사람의 시선이 의미를 만든다’는 미니멀리즘의 명제를 기술을 통해 구현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록 직접 미학 이론을 발표해 그림의 철학을 입증한 도널드 저드나 공공 장소에 대규모 작품을 설치해 관객들의 적극적인 반응을 이끌어낸 리처드 세라만큼 탁월하진 못하지만, 나름의 작가로서 돌파구를 찾아낸 셈입니다.

리처드 세라는 이렇게 거대한 철벽을 도심 광장에 설치했고, 진로에 방해를 받은 시민들의 항의(!!)로 작품이 철거되기도 했습니다.
리처드 세라는 이렇게 거대한 철벽을 도심 광장에 설치했고, 진로에 방해를 받은 시민들의 항의(!!)로 작품이 철거되기도 했습니다.
또 그녀의 작품을 실제로 보면 글리터 필터를 씌운 듯 반짝여서 ‘예쁘다’는 반응이 나옵니다.

이런 장식적 측면이 개인 컬렉터에게 어필해 작가적 생존을 이어주고 있을 가능성도 있어 보입니다.

관건은 이러한 기술이 시대를 뛰어 넘을 고전에 반열에 오를 수 있는 것이냐, 아니면 ‘신기한 요소’에 그치고 말 것이냐 라고 생각하는데요.

이 부분은 여러분이 직접 감상하면서 판단해보시길 권하겠습니다!

한 줄로 보는 전시

작품이 단조로워 다소 지루할 수 있지만 직접 경험을 통한 미니멀리즘 맛보기에 좋은 전시. 추천지수(별 다섯 만점) ★★★

전시 정보


메리 코스: 빛을 담은 회화

2021. 11. 2 ~ 2022. 2. 20

아모레퍼시픽미술관(서울 용산구 한강대로 100)

작품수 34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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