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20분 짧은 콘텐츠 인기지만 “사건-인물 담으려면 긴시간 필요”
연극 ‘카라마조프…’ 6시간 넘고 ‘엔젤스…’는 1, 2부 합쳐 8시간
객석점유율 높고 전석 매진되기도
SNS에선 “견뎠다” “버텼다” 인증… 관객과 성공적 소통 여부가 관건
10, 20분 이내의 짧은 러닝타임이 콘텐츠 흥행 공식이 된 시대에 ‘연극의 시간’은 거꾸로 가고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압축적 전개로 극에 몰입하게 하는 ‘숏폼’이나 ‘미드폼’이 대세가 됐다. 반면 연극에서는 공연시간이 최장 8시간에 이르는 작품이 나오고 있다.
대부분의 연극 공연시간은 80∼100분대. 하지만 최근에는 3시간짜리 작품은 허다하고 8시간에 달하는 대작도 다수 나오는 추세다. 2017년 초연 당시 7시간짜리로 개막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지난해 재공연에서도 6시간을 넘겼다. 미국 극작가 토니 쿠슈너가 쓴 ‘엔젤스 인 아메리카’는 지난해 1부에 이어 이달 개막하는 2부를 합쳐 공연시간이 8시간이나 된다. 올해 4월 막을 올리는 ‘금조 이야기’도 낭독회만 240분간 진행돼 무대화 작업을 거치면 공연시간이 4시간을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영상 콘텐츠와 대조적인 연극의 이런 흐름은 어떤 이유에서 비롯된 걸까. 무대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배우의 대사와 연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연극은 묵직한 주제를 제대로 다루려면 러닝타임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고 한다. ‘카라마조프…’의 나진환 연출가는 “도스토옙스키의 원작은 1700쪽이 넘어 줄거리만 짧게 압축하면 막장 드라마가 따로 없다”며 “자극적인 사건과 인물에 담긴 의미를 제대로 보여주려면 긴 시간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1985년 미국을 배경으로 동성애, 에이즈, 인종차별, 종교 문제를 방대하게 짚은 ‘엔젤스…’는 일단 대본 자체가 길다. 무대로 옮기는 과정에서 시간은 더 늘었다. 신유청 연출가는 “작품에 나오는 소수자, 인종, 종교 등 여러 주제를 관객들이 자신의 문제로 여기며 차근차근 곱씹어보길 바랐다. 작품의 의미를 충분히 생각하고 느끼려면 공연시간이 길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4∼6시간을 훌쩍 넘기는 연극을 보러 오는 관객들이 상당수 존재하는 것도 긴 작품들이 속속 등장하게 만들었다. 지난해 6시간 연속 공연한 ‘카라마조프…’의 객석 점유율은 80%에 육박했고, 4시간짜리 ‘엔젤스…’도 티켓 발매 당일 4500석 전석이 매진됐다.
‘카라마조프…’에 출연한 배우 정동환은 “편하고 쉬운 것을 늘 접하는 가운데 어렵고 무거운 작품을 원하는 관객도 분명히 있다는 걸 확인했다”며 “긴 호흡의 작품도 어떻게 소화하느냐에 따라 한 번쯤은 볼만한 가치가 있다는 느낌을 줄 것”이라고 했다. 신 연출가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견뎠다’ ‘버텼다’는 인증 글이 올라온 걸 보고서 ‘긴 연극 자체를 즐기는 관객 문화도 생겼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6·25전쟁 당시 이를 견뎌낸 사람들 개개인의 이야기를 세밀하게 비추는 ‘금조 이야기’ 역시 벌써부터 관심을 갖는 관객이 많다.
긴 연극이 늘어나는 데 대해 김명화 연극평론가는 “묵직한 텍스트, 깊이에 대한 갈망이 무르익어 생긴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이경미 연극평론가는 “긴 분량이 작품성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짜임새 있는 구성과 탄탄한 연기를 통해 오랜 시간 관객과 성공적으로 소통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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