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589년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는 만리장성 너머로 영토를 넓히기 위해 고구려를 압박했다. 특히 수나라 문제(文帝)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정벌하겠다고 위협하며 자국에 복속하라고 요구했다. 고구려가 이를 거부하자 598년 수나라는 고구려를 침공했다. 이후에도 수나라 양제(煬帝)가 612년, 당나라 태종(太宗)이 645년에 고구려를 잇달아 공격했다. 하지만 이 모든 침략은 실패로 돌아갔다. 당시 동아시아를 호령하던 수당 대군을 고구려는 어떻게 물리친 걸까.
인문지리학자로 고려대 명예교수인 저자는 ‘지오그래피’(푸른길)에서 고구려가 수당의 침공을 막아낼 수 있었던 이유로 땅의 생김새를 뜻하는 ‘지절’(肢節)을 꼽는다. 산지가 많은 땅에 자리한 고구려가 지절을 제대로 이해하고 방어에 적용했다는 것. 고구려에는 산성이 200여 개에 달했다. 특히 산의 능선과 골짜기를 이용한 포곡형(包谷形) 산성이 주류였다. 고구려는 산성 안에서 적을 상대함으로써 적은 병력으로도 방어에 성공했다. 통치체계가 우수하고 상무정신이 투철한 군사강국이었다는 점도 주효했지만, 수당의 침공루트에 지절을 고려한 산성을 구축해 맞선 전략이 승리의 비결이었다는 게 저자의 견해다.
저자는 지절 개념을 ‘지절률’로 확장한다. 지형적 다양성과 복잡성을 기준으로 지절률이 높은 땅과 낮은 땅으로 구분할 수 있다는 것. 예를 들어 리아스식 해안처럼 해안선이 복잡한 지형은 지절률이 높은 땅이다. 반면 해안선이 일자로 뻗어있으면 지절률이 낮다. 또 한 지역에 해안과 산악지형이 복잡하게 섞여 있거나, 땅에 여러 하천이 다양한 갈래로 뻗어 있는 곳도 지절률이 높은 땅이다.
지절률이 높은 땅은 대개 다양한 문명이 생긴다. 예컨대 프랑스는 센강, 루아르강, 론강 등 강의 수가 많다. 이 때문에 각 지역의 특색이 다양하고 하나로 통일될 가능성이 낮았다. 다양한 문화가 공존했기에 다른 생각을 가진 이의 입장과 권리를 이해하는 관용(톨레랑스)의 정신이 발달했다. 독일에 비해 음식 종류가 다양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저자는 산악, 고원, 평원, 사막, 바다처럼 다양한 지형이 섞인 땅을 ‘잘생긴 땅’이라고 부른다. 서로 다른 문명이 섞이며 시너지 효과를 낸다는 것.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가 문명의 발상지로 꼽히는 것도 잘생긴 땅이기 때문이다. 인류 문명이 메소포타미아에서 동쪽이 아닌 서쪽으로 확산, 발달한 이유도 지절률과 관련이 있다는 게 저자의 주장. 메소포타미아 서쪽인 지중해 동부 에게 해와 그리스 일대의 지절률은 높지만, 동쪽인 중앙아시아는 지절률이 낮다는 것이다. 문명의 발달과정을 땅의 생김새로 풀어내는 시도가 신선하다.
물론 지리적 이유 외에도 인류 역사를 바꾸는 변수는 존재한다. 지절을 역사발전의 궁극적 원인으로 보기는 힘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이 태어나고 살아가는 땅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책을 읽고나니 평지가 적어 살기에 좋지 않다고 생각한 우리나라가 지절률 관점에서는 좋은 땅이라는 사실이 눈에 들어온다. 바다, 산, 평야가 고루 뒤섞인 한반도. 그 덕에 우리는 다양한 음식과 문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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