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계단은 신전 제단으로 오르는 길이었을 것입니다. 하늘을 향해 걸어 오르는, 올려다봐야 하는 높은 길. 계단의 끝 제단에서는 왕이나 제사장이 대중들을 내려다 봤을 것이고요. 남들이 우러러보는 자리에서 동물을 죽여 피를 흘리고 태워 제사를 지냈겠지요. 계단은 처음부터 권력이 새겨진 시설물이었습니다. 좌우대칭이 완벽한 직선형태라면 더 권위적으로 보입니다.
다리는 수평으로 단절돼 있는 지점을 잇습니다. 계단은 위 아래로 떨어진 관계를 연결합니다. 청운교 백운교는 계단인데도 이름은 ‘다리(橋)’입니다. 수직적 의미보다 수평적 의미가 강한 것입니다. 계단을 올라야 대웅전으로 갈 수 있으니 불국정토로 가는 관문 역할을 하는데도 이를 위아래로 나누는 권위를 부여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수평 이동의 개념입니다. 게다가 두 ‘다리’는 대칭도 아닙니다. 비정형이죠. 권위가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 조상들은 계단에서 그다지 권위를 찾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 길고 권위적인 돌계단이 생긴 것은 일제 강점기 이후입니다.
당시 일본이 조선신사를 지을 때 생긴 것이죠. 신사는 높은 지형에 계단을 놓아 만듭니다. 신전이나 제단으로 오르는 계단인 셈입니다. 권위적인 시설물이죠. 신사가 철거된 지금, 한국인들은 이곳을 권위는커녕 이색적인 낭만의 공간으로 인식합니다. 엄숙함을 느끼는 사람은 없습니다. 연인들이 가위바위보를 하며 오르고 드라마 촬영지로 인기죠.
촬영지가 경북 포항 구룡포인데요, 남녀 주인공들이 자주 만나는 이 계단도 직선입니다. 생김새와 위치로 보아 일제 강점기 때 신사가 있었던 곳입니다.
계단이 곡선이라면 더 낭만적인 공간으로 느껴지나 봅니다. 둥글고 구부러진 계단은 안식의 장소로 인식됩니다. 서구권도 그런 것 같은데요, 영화에서 오드리 헵번이 젤라또를 먹던 스페인 광장 계단은 직선형태인데도 폭이 넓어 ‘광장(Piazza)’으로 불리는데다 아래에서 보면 윗부분이 두 갈래로 나뉘어 보이기 때문에 곡선처럼 느껴집니다.
우리나라에서 계단은 6.25 이후 많이 생겼습니다. 주로 달동네에서요. 산업화 과정을 거치며 도시로 몰려든 피난민과 이주민들이 시내 주변 언덕과 산에 자리를 잡으며 계단이 생활 속에 많이 생겼지요. 당연히 계획적인 직선보다는 구불구불한 모양이 많았습니다.
미성숙한 젊은이의 고루한 생활 공간인 동시에 친구와의 추억이 서린 장소로 소환되죠. 골목 짜투리 계단이 친구와의 아지트로 변주됩니다. 공공장소인데도요.
커피를 다 마시고 계단을 내려는데 맞은 편 벽면에 어려운 4자 성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참동안 읽으려 애썼습니다. 논어나 맹자 등 고전에 있는 경구 같은데… 아, 경구는 경구네요. ‘계단조심’.
우리가 누굽니까. 해학과 낭만의 민족 아닙니까. 가장 권위적이라는 법원의 계단마저 드라마에선 변호사 주인공이 멋짐을 뿜어내는 배경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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