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전반 패커드-듀센버그 등 유럽 견줄만한 브랜드 있었지만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 겪으며 ‘울트라 럭셔리’ 시장 발달 못해
20세기 중반 경제상황 좋아져… 캐딜락-링컨 등이 명맥 유지
전기차 흐름 타고 재도약 꿈꿔
자동차 분야에서 럭셔리 브랜드를 구분하는 기준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다. 그동안 ‘류청희의 젠틀맨 드라이버’ 칼럼에서는 ‘울트라 럭셔리(ultra luxury)’로 분류되는 브랜드들을 주로 다뤘다. 럭셔리 브랜드 중에서도 가격대가 좀 더 높고, 소량 맞춤 제작에 특화된 곳들이다.
울트라 럭셔리 브랜드에서는 다른 공통점도 찾을 수 있다. 대부분 영국,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럭셔리 제품이 탄생해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던 문화적 배경의 영향이 크다.
그러나 자동차만 놓고 보면, 소비자층의 폭이 넓고 규모가 큰 시장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럭셔리 자동차에 대한 수요가 있기 마련이다. 오랫동안 단일 시장으로서는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했던 미국이 대표적이다. 현대의 자동차가 발명되어 기술의 꽃을 피우기 시작한 곳은 유럽이지만, 미국 역시 이미 19세기 후반부터 자동차 생산을 시작했을 만큼 역사도 길다.
그럼에도 지금 미국 자동차 업계에는 토종 럭셔리 브랜드가 많지 않다. 울트라 럭셔리급으로 취급되는 브랜드는 없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 과연 ‘아메리칸 럭셔리’ 차 브랜드들은 어떤 일을 겪었기에 자동차 대국에 어울리지 않는 상황에 이르렀을까.
과거에는 사정이 좀 달랐다. 20세기 전반기에는 유럽 럭셔리 브랜드와 견줄 만한 차들을 내놓는 미국 브랜드들도 존재했다. 대표적인 것이 패커드(Packard)와 듀센버그(Duesenburg)다.
패커드와 듀센버그의 차들은 비슷한 크기의 다른 미국 럭셔리 차들보다 훨씬 비싸고 호화로웠다. 전문 차체 제작업체들의 손을 거쳐 유럽산 럭셔리 차들 못지않게 개성 있고 예술적인 모습을 갖췄다. 길고 웅장한 차체는 거대하고 강력하며 부드럽게 작동하는 직렬 8기통 엔진이나 V12 엔진의 힘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그들은 그 시절의 울트라 럭셔리 브랜드라고 할 수 있는 롤스로이스, 이소타 프라스키니, 이스파노 수이자 등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러나 다른 럭셔리 자동차 브랜드들과 마찬가지로, 20세기 전반에 있었던 두 번의 큰 격랑이 그들을 뿌리째 흔들었다. 첫 번째는 1929년 미국의 주가 폭락에서 시작된 대공황이었고, 두 번째는 10여 년 뒤에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울트라 럭셔리 차를 살 수 있는 사람들이 크게 줄어들자, 몇몇 브랜드는 좀 더 작고 저렴한 차를 출시해 어려움을 극복하려 했다. 그러나 그 영역에는 이미 다른 브랜드들이 신뢰성과 가격이라는 무기로 탄탄히 자리를 잡고 있어 경쟁이 어려웠다. 그리고 2차대전 기간 중 군수물자를 생산하며 버텼던 업체들은 전쟁이 끝난 뒤 자동차 생산을 정상화하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그래서 미국의 울트라 럭셔리 차 브랜드들은 2차대전 이후로 몇 년 사이에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고난을 거치며 살아남은 브랜드들은 미국을 대표하는 양대 자동차 집단, 제너럴모터스(GM)의 캐딜락과 포드의 링컨이었다. 다른 울트라 럭셔리 브랜드들이 기술과 화려함에만 집중했던 것과 달리, GM과 포드는 일찌감치 수익성에 초점을 맞춰 다양한 브랜드로 폭넓은 소비자를 상대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춘 덕분이었다.
그들은 미국의 경제적 영향력이 가장 강력했던 시기에 가장 화려하게 빛났다. 1950년대와 1960년대의 대표적 모델은 캐딜락 드빌과 엘도라도, 링컨 컨티넨탈이었다. 캐딜락과 링컨은 커다란 차체, 화려한 디자인, 사치스러운 꾸밈새의 절정을 보여주었다. 세계 최강대국으로 자리 잡은 미국의 위상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차들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시절 캐딜락과 링컨의 최상위 세단들은 이미 크기 면에서 지금의 초대형 세단을 능가했다. 차체 길이는 링컨 컨티넨탈이 5.4m, 캐딜락 엘도라도 브로엄은 5.7m에 이르렀고, 너비는 모두 2m가 넘었다. 최상급 차에 어울리도록 모두 V8 엔진을 썼고, 엔진 배기량은 1960년대 후반에 이르면서 7.5∼8L까지 커졌다. 어느 쪽이나 지금 차들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연료를 소비했지만, 이 차를 살 만한 경제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끝 모르고 커지던 캐딜락과 링컨 차들은 세계 경제를 뒤흔든 또 다른 충격파로 움츠러들었다. 두 차례의 석유파동으로 과잉의 시대가 막을 내린 것이다. 치솟은 유가 때문에 소비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경제적인 차로 눈길을 돌렸고, 아메리칸 럭셔리 브랜드들 역시 살아남기 위해 뼈를 깎아야 했다.
차와 엔진의 크기는 줄어들었고, 같은 회사 내의 대중적 브랜드 차에 쓰인 설계와 기술로 갈아탔다. 특별함과 다름을 내세워야 할 럭셔리 차들은 꾸밈새만 호화로울 뿐 평범한 차들과 다를 것이 없어졌다. 그렇게 아메리칸 럭셔리 차들의 성격은 완전히 달라졌고, 꾸준히 내공을 쌓아온 유럽 브랜드들에 성능과 품질, 꾸밈새 등에서 밀려 시장 주도권을 넘겨줘야 했다. 물론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시도는 이어졌지만, 미국 경제동향에 따라 부침을 거듭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앞으로도 한동안 미국에서 울트라 럭셔리로 분류될 차나 브랜드가 나오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미국을 대표하는 럭셔리 브랜드로서, 캐딜락과 링컨은 전동화 흐름을 새로운 도약의 기회로 여기고 있는 듯하다.
캐딜락은 올해 상반기 중 첫 순수 전기 크로스오버 SUV인 리릭(LYRIQ)을 출시할 예정이다. 완전히 새로 개발한 순수 전기차 기술을 바탕으로 만든 리릭은 뛰어난 효율과 높은 수준의 주행 자동화(자율주행) 기술을 갖추고 있다. 한편 올해로 포드의 일원이 된 지 100년이 된 링컨은 2030년까지 글로벌 시장의 모든 모델 포트폴리오를 커넥티드화 및 전동화한다고 최근 발표했다. 특히 링컨은 지난 10여 년간 유행에 발맞춰 SUV 모델을 다양화하고 고급화 수준을 꾸준히 높여온 터라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된다.
앞서도 설명했듯, 럭셔리의 기준은 과거와 현재, 미래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지금은 전통적 기준에서 ‘평범한 럭셔리 브랜드들만 남아 있지만, 사용자경험과 첨단 기술이 중요한 미래에는 글로벌 규모의 IT 기업들을 키워낸 미국에서 다시 울트라 럭셔리 범주에 들어갈 차들이 나오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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