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겪고 파견된 조선통신사가 본 일본 그리고 일본인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2월 25일 14시 06분


에도시대 도시를 걷다
김경숙 지음
332쪽·2만3000원·소명출판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그의 아들 히데요리를 조선 사람들은 어떻게 바라봤을까. 7년 간 지속됐던 전란 후 약 10년 뒤인 1607년부터 다시 일본에 파견되기 시작했던 조선통신사의 기록에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신유한이 1719년에 쓴 사행록에는 ‘히데요시가 오사카에 살면서 싸움을 즐기고 사치하고 백성의 고혈을 긁어다 욕심을 채웠다’는 기록이 있다.

1607년 4월 9일 오사카 하구에 도착한 사행 중 한 명이었던 경섬은 ‘해사록’에 히데요리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음식을 먹을 때에도 풍악을 폐하지 않았고, 오직 호화와 사치를 스스로 즐기었으며, 일의 처리가 많이 유약하므로 왜인들이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다고 한다.’ 히데요리가 패망하게 된 경위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고전문학을 전공한 뒤 조선 후기 문화를 연구해 온 저자는 1607년부터 1764년까지 총 11차례에 에도 막부에 파견됐던 통신사행들이 관찰한 오사카, 교토, 나고야, 에도 등 일본 주요 도시에 대한 기록을 탐구했다. 전쟁의 상처가 가시지 않은 때, 조선인들은 왜란을 일으킨 히데요시와, 그를 물리친 도쿠가와 이에야쓰 휘하의 에도 막부를 어떻게 바라봤을까?

통신사행의 여정은 오사카항 하구에서부터 시작됐다. 오사카 시내 나루터 주변의 인가를 묘사한 기록은 생생하다. 1719년 신유한은 이렇게 글을 남겼다. ‘모든 집의 담과 벽이 다 화려하게 색칠을 하였다. 낮고 습해서 거처할 수 없는 곳에는 푸른 풀로 금빛 방죽을 만들었는데 깨끗하여 침도 뱉을 수 없을 정도였다.’ 잡초가 난 곳조차 관리가 잘 돼 있었다니, 청결을 중시하는 일본의 문화가 하루아침에 생긴 게 아님을 보여주는 것 같다.

한편 조선인들은 실권이 없는 일왕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이로 인해 벌어질 위험을 우려했다. 원중거는 “일왕을 끼고 쟁탈을 도모하는 자가 다시 나타나지 않을지 어찌 알겠는가. 저 나라가 어지러워진다면 변방의 교활한 무리가 반드시 기회를 타서 우리 땅을 노략질하게 될 것”이라고 썼다. 실제 에도 막부가 무너진 뒤 일본은 조선 침탈에 나섰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인 ‘피로인’에 대한 기록은 전쟁이 남긴 상처를 보여준다. 1636년 통신사행들이 지나갈 때 ‘자주 눈물을 닦으며 번거로이 절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피로인들이었다’는 기록이 그렇다.

책의 묘미는 통신사행들이 남긴 상세한 기록을 통해 400여 년 전 일본 문화와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다는 점이다. 늦은 저녁 배를 타고 가다 강물에 놓인 다리를 본 조명채는 1748년 ‘공중에 밝게 빛나는 불 구슬이 문득 가까워져 오고, 만 길 뻗은 무지개가 뱃머리에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고 적었다. 불 구슬은 다리 위에 밝힌 등불이고, 무지개는 다리였다. ‘여인들이 한가로운 도회의 자태를 더하고 분칠을 낭자하게 하여 눈을 현란하게 하였다’는 1764년 원중거의 교토 방문 기록도 흥미롭다. 통신사행들의 글을 따라가며 그들이 걸었던 길을 머릿속에서 함께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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