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남한강을 품은 ‘중원의 땅’ 충주
중앙탑, 王氣 누르려 세워졌을 듯… 이후 국태민안 빌거나 위령제 지내
충주, 고려 때도 새 도읍지로 거론… 탄금대 절경엔 우륵-신립의 흔적
천-인-지 삼등산, 3대왕 배출 전설… 기를 받으며 조동공원 산책 즐길만
국토의 중심이라는 상징성 때문일까, 충북 충주는 예부터 왕업(王業) 또는 왕도(王都)와 관련한 얘기가 무성한 도시였다. 신라 때는 오소경(五小京) 중 하나인 중원경(中原京)으로 국토의 중앙임을 자부한 부(副)수도였고, 고려 때는 한양 평양과 함께 새 도읍지 후보로 어깨를 겨루던 곳이다. 지금도 충주시를 휘감아 돌아가는 남한강변에는 왕기(王氣)와 관련한 비밀스러운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왕기를 진압하라”
국보 제6호 탑평리칠층석탑(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 건립 당시 국토 중앙에 서 있다고 해서 중앙탑으로 유명한 곳이다. 지형도 범상치 않다. 강원도에서 발원한 남한강이 흘러오다가 속리산에서 발원한 달천과 합수(合水)한 뒤 S자 모양으로 굽이쳐 흐르면서 수태극(水太極)을 이루고 있다. 1985년 충주댐 건설로 수로와 수량이 더욱 풍성해졌을 뿐, 지형은 지금이나 천년 전이나 명당 길지의 조건을 갖춘 곳이다.
때는 불교가 흥성했던 통일신라. 어느 날 송림사 주지가 중원경(충주)을 지나다가 강물에서 보라색 안개가 퍼져나가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신비롭고도 장엄한 기운은 탑평리 고을 쪽으로 뻗어나갔다. 보라색(혹은 자주색)은 왕권을 상징하는 색깔이기에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주지는 경주로 급히 돌아가 왕에게 “중원경에 왕기가 있으니 이를 진압하기 위해서는 탑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탑평리칠층석탑 건립 배경에 얽힌 전설이다. 남한강변(탄금호) 야트막한 언덕에 조성된 이 탑(높이 14.5m)은 현전하는 통일신라 석탑 중 규모가 가장 크고 높다. 이 일대는 여러 차례 발굴 조사됐지만 지금까지도 사찰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탑은 사찰용 불탑(佛塔)이 아니라 어떠한 목적 혹은 기원을 염두에 둔 원탑(願塔) 성격이 짙다는 학설이 힘을 얻고 있다. 통일신라 후기에 약해진 왕권을 강화하고 흉흉한 민심을 다독이기 위해 국토 중앙에다 이런 탑을 세웠다는 해석이다.
중앙탑의 이 같은 상징성은 현대에도 이어진다. 지금도 이 지역 사람들은 중앙탑에서 탑돌이를 하며 국태민안(國泰民安)을 빌거나 호국영령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공원 내에는 국내 조각가들의 작품 26점, 야경이 멋진 탄금호 무지개길, 충주박물관, 조정경기장 등 즐길거리도 많아 관광객들이 꾸준히 찾는 명소가 됐다.
○남한강에 제사 지낸 탄금대
충주는 고려 시대에 들어서서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다. 국원경(國原京)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새 도읍지로도 자주 거론됐다. 고려 후기 바다를 통한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수도 개경 방어가 불안해지자 내륙의 요새이며 교통의 중심인 충주가 천도지로 부상한 것이다. 공민왕(재위 1351∼1374년)은 충주에 이궁(離宮)을 세운 뒤 주기적으로 충주에서 머물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고려 때 신돈, 이인임 등이 주장한 ‘충주 천도론’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충주가 한 국가의 서울이 될 수 있는 기운을 머금고 있는 터였음을 말해준다.
그런 흔적들은 중앙탑에서 물길을 따라 충주댐이 있는 충주호로 가는 남한강변 곳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먼저 중앙탑에서 자동차로 10분 남짓한 거리(약 6km)에 탄금대가 있다. 탄금대는 신라 시대 가야 출신의 악성 우륵이 충주를 찾은 진흥왕 앞에서 가야금을 연주한 곳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우륵의 애절한 가야금 연주가 들리는 듯한 ‘탄금정’ 정자와 기암절벽을 따라 강물이 휘감아 도는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열두대’ 바위가 대표적인 관광 포인트다.
그런데 이곳이 고려 이후 국가 차원에서 대천(大川·한강)에 제를 지내던 신성한 공간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고려사’에 등장하는 양진명소(楊津溟所)가 바로 탄금대였다. 탄금대 아래 깊은 소(沼·연못)를 가리키는 양진명소는 한강 상류를 관할하는 수신(水神)인 용이 사는 곳이라고 해서 용추(龍湫) 혹은 용당(龍堂)으로 불렸다. 그리고 수신을 모신 사당인 양진명소사에서는 관 주도로 정례적인 제사가 이뤄졌다. 왕실에 변고가 생겼을 때 기원하는 기고제(祈告祭), 새로 부임한 충주목사가 찾아와 인사하는 고유제(告由祭) 등이 이곳에서 치러졌다.
그간 양진명소와 그 사당인 양진명소사는 기록만 전해질 뿐, 그 위치와 실체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다 2020년 충주 역사 문화를 연구하는 민간단체(예성문화연구회)가 양진명소사의 위치와 모습을 담은 100년 전 사진을 찾아냈다. 연구회 측에 의하면 탄금대 신립장군순절비가 있는 곳이 바로 양진명소사 터라고 한다.
신립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왜군과 싸우다 전사한 장군이다. 당시 조선 군사 수천 명도 이곳에서 희생됐다. 조선 정부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인 1602년 양진명소사에서 전사한 장졸들의 넋을 위로하는 위령제를 열었다. 그러다 약 380년 지난 1981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양진명소사 바로 그 터에 신립장군순절비가 건립된 것이다.
○3대 왕 배출하는 삼등산
탄금대에서 다시 충주댐 방향으로 10km 정도 이동하다 보면 조동근린공원(동량면 조동리)을 만나게 된다.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은 공원이지만 조만간 ‘풍수와 낙조’를 테마로 하는 이색 체류형 관광지가 들어설 곳이다. 충주시는 이곳에다 2023년 완공을 목표로 ‘천지인 삼태극 풍수 휴양촌’을 건설하고 있다.
그럴싸한 건립 배경도 있다. 조선 세조 때 황규라는 풍수 지관이 있었다. 조선팔도의 명당을 찾아다닌 그는 충주에 이르러 명당을 찾게 해달라고 산신제를 올린 후 잠이 들었다. 이윽고 꿈에서 천등산, 지등산, 인등산에 명혈이 있는데, 이 기운을 받아 3대의 왕이 날 것이라는 신선의 계시를 듣게 된다. 위성지도를 보면 박달재로 유명한 천등산, 인등산, 지등산이 마치 삼태극 모양으로 물결을 이루듯 이어져 있다. 3대왕 배출 전설이 나올 만한 지세다.
삼등산 중 휴양촌이 들어서는 조동근린공원은 지등산의 끝자락에 위치해 있다. 봄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벚꽃동산으로 유명한 이곳은 호젓하게 즐길 수 있는 산책 코스다. 잘 다듬어진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지등산의 땅 기운을 덤으로 받는 체험을 할 수 있다.
왕이 난다는 전설은 삼등산에서 그치지 않는다. 마지막 여행 여정인 충주호에도 비슷한 전설이 있다. “월악산 영봉 위로 달이 뜨고, 이 달빛이 물에 비치고 나면 30년쯤 뒤에 여자 임금이 나타난다. 여자 임금이 나오고 3∼4년 있다가 통일이 된다.” 탄허 스님이 1975년 월악산 자락 덕주사에서 한 말이라고 한다. 1970년대 중반에는 월악산 주변에는 밤하늘의 달빛을 담을 만한 큰 강이 흐르지 않았다. 1985년 충주댐 건설로 충주호가 생겨나면서 비로소 달빛이 비치는 큰물이 생겼다. 그 후 30년이 지나자 예언처럼 여성 대통령이 탄생했다. 하지만 세월은 흘러 2022년이 됐어도 남북통일은 되지 않았으니 아직은 미완성의 예언인 셈이다.
충주댐을 건너 광활한 충주호로 들어서면 호수 저 멀리로 월악산의 주봉인 영봉이 눈에 들어온다. 굳이 예언을 떠올리지 않아도 환상적인 경치만으로도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충주호와 영봉이 함께하는 경치는 충주나루의 충주호관광선을 이용하거나, 카페 ‘호수가 아름다운 전망대’(동량면 화암리)에서 감상할 수 있다. 카페 주인장은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충주호반과 월악산은 충주 최고의 비경”이라고 자랑한다. 한편 카페에서 호수 건너편으로는 체험형 테마파크인 활옥동굴과 심항산 숲길을 산책할 수 있는 ‘충주호 종댕이길’이 있다.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 나들이에 좋은 힐링 코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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