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한국에 새로운 세계문학전집이 필요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우리의 지성과 감성의 기준에 부합하는 세계문학을 다시 구상할 때가 됐다.”
10년 전 대학에서 문학 수업을 들었을 때다. 담당 교수는 수업 첫날 학생들에게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에 실린 발간사를 소리 내 읽으라고 했다. 그동안 영미권 문학에 치중돼 있던 세계문학전집의 외연을 확장하고자 한 출판사의 의도를 이해시키기 위해서였으리라. 실제로 2009년 시작된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은 페루 소설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86), 콜롬비아 소설가 알바로 무티스(1923∼2013) 등 제3세계 여러 작가들을 한국에 알렸다.
그날 이후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을 사면 꼭 이 발간사를 먼저 읽는다. 내가 읽는 이 책이 문학사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는지 되새겨보기 위해서다. 최근 이 발간사를 다시 찾아 읽게 됐다. ‘여성’이라는 키워드와 함께 새로 시작된 세계문학전집 시리즈들 때문이다. 출판사 은행나무는 올 1월부터 세계문학전집을 펴내기 시작했는데 여성을 주제로 삼았다. 출판사 휴머니스트가 지난달부터 내놓은 세계문학전집의 첫 주제도 여성이다. 이제 제3세계에 이어 여성이 세계문학의 핵심 주제로 떠오른 것이다.
이 소설집은 휴머니스트 세계문학전집의 두 번째 작품이다. 영국의 여성 작가 엘리자베스 개스켈(1810∼1865)은 당대 영국 현실에 대한 소설을 썼는데 당시 여성이 느끼는 생생한 공포가 담겨 있는 게 특징. 표제작인 단편소설 ‘회색 여인’은 주변의 권유로 원치 않은 결혼을 하게 된 여성이 남편이 사실 잔혹한 살인마라는 사실을 알아채면서 벌어진 일을 그린다. 중편소설 ‘마녀 로이스’는 중세시대 여성을 상대로 벌어진 마녀재판을 다룬다. 단편소설 ‘늙은 보모 이야기’는 부모가 죽은 뒤 방황하는 자매의 이야기로, 살아남기 위해 불합리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당시 여성들의 마음이 묘사돼 있다.
어떻게 저런 억압을 받았을까 싶지만 200년 전 여성들에게는 일상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독자들도 신선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일까. 그동안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의 책인데도 출간 직후 여러 서점에서 고전 분야 베스트셀러 순위에 들었다. 2016년 출간된 장편소설 ‘82년생 김지영’(민음사) 이후 한국문학을 주도하던 여성이라는 주제가 이제는 세계문학으로 확장된 것이다.
이제 다음 세계문학전집의 주제는 무엇일까. 지난해 한국 독자들을 사로잡은 판타지나 공상과학(SF) 소설일 수도 있고, 부동산이나 가상화폐 등 자본주의와 관련된 작품일 수도 있겠다. 그동안 발굴되지 않은 옛 국내 작가나 동남아시아 작가가 새롭게 조명될 수도 있다. 고전은 늘 변화하는 법. 다음 세계문학전집의 주인공은 누구일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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