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코로나19 이전과 이후의 삶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말한다. 한 때 국내 마스터스마라톤 여자 최강으로 군림했던 정순연 씨(48)도 마찬가지다.
“2020년 3월 열리는 서울국제마라톤 겸 동아마라톤에서 제 개인 최고기록을 깰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습니다. 트랙에서 1만m를 36분10초에 달리는 등 모든 훈련 기록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해 2월 코로나19가 터져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가 힘든 시기에 접어들었습니다. 그 이후 모든 마라톤대회가 취소되는 바람에 기록을 깰 기회 자체가 사라졌습니다.”
정 씨는 2015년 서울국제마라톤에서 2시간 43분 13초의 국내 여자 마스터스 마라톤 풀코스 최고기록을 세웠다. 이후 이 기록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었다.
“동아마라톤 코스가 가장 좋잖아요. 솔직히 2015년 동아 이후 더 몸이 좋은 때가 있었는데…. 코스도 다르고 계절도 다르고 기록 경신을 하지 못했죠. 2020년엔 달랐어요. 솔직히 2015년엔 준비도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좋은 기록이 나왔다면 2020년엔 준비도 잘 했고 컨디션도 좋았어요. 동아마라톤만 열렸다면 2시간 43분 안쪽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죠.”
코로나19는 정 씨의 투쟁력도 감소 시켰다. 그는 “대회가 없어지니 체계적인 훈련도 잘 되지 않았다”고 했다. 가끔 군소 대회가 열리긴 했지만 기록을 내려면 동아마라톤 같은 메이저 대회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달리는 것을 멈추진 않았다. 알음알음으로 소규모로 달리다 네이버에 Running Mate란 카페를 개설하고 함께 달리고 있다. 회원이 130여명이나 된다.
“정기모임은 주말에 주 1회하고 주중엔 마음에 맞는 회원들끼리 삼삼오오 모여서 달리고 있어요. 기본부터 지도도 하고, 자체 대회도 만들어 달리기도 하고.”
정 씨는 한 달에 300km는 달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주 4회 이상은 훈련을 하면서 인터벌트레이닝도 한다. 장거리는 15~20km를 달리고 있다. 장거리는 여럿이 함께 달리고 인터벌 트레이닝은 2~3명이 어우러져 한다. 마라톤동호회에는 나이 많은 회원들이 많은데 Running Mate엔 3040 비교적 젊은 회원들이 많단다. 대부분 직장을 다니며 건강을 챙기는 사람들이라고.
“재미나게 즐겁게 달리는 게 모토입니다. 건강을 위해 달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언제든 대회가 열리면 기록에 도전하기 위해서 나름 체계적으로도 훈련하고 있어요.”
코로나19가 터지면서 소규모로 산을 달리는 트레일러닝이 인기를 끌고 있다. 정 씨는 “산을 달리는 것은 좋아한다. 하지만 대회 출전했을 때 몇 번 넘어지다 보니 트레일러닝 대회에는 잘 참가하지 않는다”고 했다.
대학 1학년 때까지 육상 중장거리 선수생활을 했던 정 씨는 어느 순간 운동할 동력을 잃어버렸다. 그는 “고등학교 때까진 운동을 안 하면 안 되는 것이었는데 대학에 들어가면서 좀 느슨하게 살다보니 살이 쪘고 그러다 아예 운동을 놓았다”고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하고 육아에 전념하면서는 “운동이라는 개념 자체를 잊고 살았다”고 했다.
“아이 좀 키웠더니 마라톤 붐이 일어났어요. 그래도 달릴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에어로빅을 함께 하는 사람들 끼리 2006년 9월 대구에서 열리는 마라톤대회에 나가자고 해서 10km를 달렸는데 너무 좋았습니다. 그런 기분 처음이었습니다. 달리는 사람도 좋아하고 응원하는 사람도 열광하고…. 제 맘에 딱 와 닿았죠. 그 때부터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고통 뒤에 오는 짜릿한 쾌감이 그를 매료시켰다. 엘리트 선수였던 학창시절엔 시켜서 억지로 하는 것이었지만 이젠 자발적으로 즐기면서 하는 것이 달랐다.
역시 한 때 선수로 활약해서인지 바로 실력이 향상됐고 재미도 붙었다. 학창시절 10km를 33분20초에 달렸던 그는 바로 마스터스 마라토너들에게는 꿈의 기록인 ‘서브스리(3시간 이내 기록)’에 도전했다. 몇 차례의 실패 끝에 2009년 3월 울산마라톤에서 2시간 58분06초 처음 서브스리를 달성했다. 이 때부턴 서브스리는 식은 죽 먹듯 했다. 그해 2주 뒤 열린 서울국제마라톤에서 2시간 55분36초, 2010년 서울국제마라톤에서 2시간 51분20초로 개인 최고기록을 경신한 뒤 2015년 서울국제마라톤에서 개인 최고기록이자 국내 마스터스마라톤 여자 풀코스 최고기록을 세운 것이다. 달리면서 자연스럽게 예전의 몸매를 돼 찾았다. “6kg이 빠졌다. 다른 사람들은 느끼지 못할 수 있지만 내겐 엄청 부담스러운 6kg이었다. 그게 빠지니 날아갈 것 같다”고 했다.
서울국제마라톤, 경주국제마라톤 여자 마스터스에서 우승하는 등 전국 대부분의 마라톤을 휩쓸었다. 마스터스마라톤 계에선 ‘달리는 얼짱 마라토너’로 이름을 날렸다. 정 씨는 2010년 ‘동아마라톤 올해의 선수상’ 20·30대 여자 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그해 동아마라톤에서 좋은 성적을 낸 마스터스 마라토너 중에서 선발해 주는 상이다. 정 씨는 그해 3월 서울국제마라톤에서 2시간 51분 20초, 10월 경주국제마라톤에서 2시간 55분 44초를 기록하며 우승했다.
마라톤은 그가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좋은 친구였다.
“달리면서 극한 상황을 경험해서인지 살면서 감정 컨트롤이 잘 됐어요. 가정은 물론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다양한 스트레스가 생기는데 전 달리기로 다 풀었어요. 달리면 모든 것을 떨쳐내고 저 자신에만 집중할 수 있습니다.”
이제 50세를 눈앞에 뒀다. 100세 시대, 50년을 더 살아야 한다. 그 때까지 달릴 수 있을까?
“안 가본 세상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달리는 게 즐겁고 아직 건강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기록보다는 즐겁게 달리는 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렇게 즐겁게 달리다보면 평생 달릴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고 목표가 없진 않다.
“제 최고기록은 이제 나이가 들어 깰 수 없겠죠. 하지만 제가 달릴 수 있을 정도의 기록을 목표로 설정하고 달릴 겁니다. 즐기되 이렇게 목표를 정하고 달리면 그 목표를 달성했을 때 기쁨도 아주 큽니다. 그게 달리는 재미죠. 코로나19가 사라지는 순간 전 다시 저만의 목표를 위해 달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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