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주 경주박물관장 퇴임 앞두고 ‘30년 큐레이터’ 담은 에세이 출간
1997년 임실서 불상 우연히 발견… 1년간 조사끝에 ‘9세기 조성’ 밝혀
“영원한 유물 역사에 한 장 더해졌죠”
1997년 봄 전북 임실군 중기사(中基寺) 법당. 최선주 당시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현 국립경주박물관장·59)가 휴일을 맞아 법당을 둘러보고 나오는데 옆방 문 틈새로 거대한 그림자를 봤다. 방 안으로 고개를 들이민 순간 심장이 멎는 듯했다. 목에 금이 간 1.2m 높이의 비로자나(毘盧遮那) 불상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던 것. 전라도 지역에 옛 비로자나불이 드문 데다 옷 주름까지 정교하게 표현된 만듦새도 일품이어서 예사 불상이 아님을 직감했다. 불상을 받치던 대좌(臺座)는 법당에 따로 보관돼 있었다. 앞서 대좌만 1977년 전북도문화재로 지정됐을 뿐 정작 불상은 사실상 방치된 상태였다.
당시 3년 차 학예연구사였던 그는 불상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이후 1년간 휴일마다 사찰을 찾아 현장조사를 벌인 끝에 불상이 9세기 중엽 통일신라시대 진구사(珍丘寺)에서 조성된 사실을 알아냈다. 그는 조사 결과를 논문으로 정리해 1998년 국립중앙박물관의 제1회 동원학술대회에서 발표했다. 그 덕분에 불상은 2003년 전북도문화재로 추가 지정돼 보존 관리될 수 있었다.
“소외된 유물에 빛을 밝혀주는 큐레이터가 되고 싶다”던 청년은 어느덧 퇴임을 앞둔 박물관장이 됐다. 경북 경주시 국립경주박물관에서 7일 만난 그는 “지난해 비로자나불을 다시 찾아가 보니 대좌에 올라 당당히 세상 밖으로 나왔더라. 큐레이터가 되길 참 잘한 것 같다”며 웃었다. 그는 1991년부터 큐레이터로 일한 경험을 담은 에세이 ‘박물관 큐레이터로 살다’(주류성)를 3일 펴냈다.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한 여러 지방 박물관을 거치며 굵직한 특별전을 기획한 그는 유물의 진가를 드러내는 방법을 고민해왔다. 2019년 국립중앙박물관 연구기획부장으로 일하며 기획한 ‘영월 창령사 오백나한 특별전’도 그중 하나. 득도한 나한(羅漢·불교에서 깨달음의 경지에 오른 성자) 500명을 형상화한 오백나한상은 2001년 강원 영월군 산속에서 농부가 처음 발견했다. 이후 강원문화재연구소가 2년에 걸쳐 나한상 317점을 발굴했다. 이들 상당수는 머리가 없거나 머리만 남은 상태였다.
“화강암으로 만든 거칠고 소박한 나한상에 어떤 힘이 있기에…. 500년간 땅속에 묻혔지만 결국 빛을 봤어요. 유물이 가진 힘에 대해 고민했죠.”
고민 끝에 찾은 해답은 부처의 가르침. 미술작가와 협업해 전시장에 스피커 740개를 탑처럼 쌓아올려 나한상을 사이사이에 설치했다. 스피커에서는 물소리와 함께 종소리가 흘러나왔다. 속세에서 벗어나 고요 속에서 자기 안의 소리를 성찰하는 시도였다. 전시가 끝난 2020년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서 전시 요청이 들어왔다. 오백나한 특별전은 내년에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서 열린다.
퇴임사를 쓰듯 책을 썼다는 그는 “30년 가까이 박물관 큐레이터로 일한 사람으로서 같은 길을 가려는 이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단 한 점의 유물이라도 다르게 보자는 거예요.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바닥과 모서리를 보세요. 유물에 새로운 가치를 찾아 비추면 역사 한 장이 더해져요. 큐레이터는 유한한 직업이지만 이 발견은 유물의 역사에 영원히 빛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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