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논픽션’으로 그려낸 ‘SF 거장’의 일생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3월 12일 03시 00분


◇필립 K. 딕/엠마뉘엘 카레르 지음·임호경 옮김/520쪽·2만5000원/사람의집

한 남성이 욕실 문턱에서 전등 켜는 줄을 찾으려고 허우적댄다. 어둠 속에서 한참 손을 휘저어도 줄은 잡히지 않는다. 남성은 곧 애초에 줄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존재하지도 않는 줄을 오랫동안 사용해 온 물건처럼 찾고 있었다. 그는 자문한다. ‘도대체 내가 언제부터 전등 줄 잡아당기는 습관을 갖게 된 걸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미국 SF 문학의 거장으로 불리는 필립 K 딕(1928∼1982). 저자는 딕이 SF 작가로 유명해지기 전 일화를 소개한 뒤 말한다. “이런 일 앞에서 대부분은 ‘거참 이상하군’ 하고 지나쳐버린다. 하지만 그는 아무 의미도 없을 것 같은 일에서 어떤 의미와 대답을 찾는 사람이었다.”

별것 아닌 상황에 대한 딕의 집요한 질문과 상상은 창작의 밑거름이었다. 일상적인 상상에서 출발한 그의 작품은 사후 20세기 SF 영화의 전설 ‘블레이드 러너’는 물론이고 ‘토탈 리콜’ ‘마이너리티 리포트’ 등 수많은 명작 SF 영화의 원작이 됐다. 그가 ‘SF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유다.

프랑스 소설가이자 전기 작가인 저자는 이 평전에서 천재 작가가 태어난 순간부터 심장마비로 사망하던 순간까지의 일대기를 써내려간다. 전등 줄 찾기 에피소드처럼 딕이 일상의 평범한 일을 포착해 SF 소재로 키워가는 주요 장면들은 소설처럼 묘사한다. 핵전쟁으로 파괴된 지구 주위를 도는 우주비행사가 되는 상상 등 딕의 머릿속을 채웠던 수많은 이야기도 생생하게 펼쳐낸다.

강박증, 공황장애 등 각종 정신질환에 시달리며 평생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받아야 했던 사실, 다섯 번 결혼하고 모두 이혼하는 등 그의 작품 세계에 영향을 미친 이야기들이 빼곡히 담겼다. 장편소설 36편, 단편소설 100편 이상을 발표하고도 생활고를 겪어야 했던 천재 작가의 불운한 일생과 성격적 결함을 포함한 약점까지…. 별다른 미화 없이 담백하고 폭넓게 삶을 담아낸 솜씨가 돋보인다.

#필립 k. 딕#논픽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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