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속 죽음의 공포 누가 비웃을 수 있을까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3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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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를 영화로 읊다]〈35〉전장에서 돌아온 이 몇이더냐?

영화 ‘철십자 훈장’에서 패전해 쫓기면서도 철십자 훈장을 받는 데만 몰두하는 귀족 출신 장교를 비웃는 슈타이너 상사. 동아일보DB
영화 ‘철십자 훈장’에서 패전해 쫓기면서도 철십자 훈장을 받는 데만 몰두하는 귀족 출신 장교를 비웃는 슈타이너 상사. 동아일보DB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영광의 길’(1957년)에는 적군의 요새로 무모한 돌격을 감행하기 전날 밤 병사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들은 총검에 찔리기보단 기관총에 맞는 게 낫다거나 폭탄이 제일 두렵다는 등 어떻게 죽는 게 덜 고통스러울까 고민한다. 그러다 죽고 싶지 않은 것만큼은 다 똑같다는 결론을 내린다. 영화사에서 전쟁 영화가 하나의 줄기를 형성하는 것처럼 한시의 역사에도 변방을 배경으로 이민족과의 전쟁을 읊은 ‘변새시(邊塞詩)’가 있다. 변새시는 당나라 때 특히 유행했다. 왕한(王翰·687∼726)의 다음 시도 그중 하나다.


제목에 있는 양주는 지금의 간쑤(甘肅)성 우웨이(武威)시 일대다. 당나라 시인들은 당시 변경이었던 양주에서 유래한 곡조에 노랫말을 붙여 변새의 풍경과 전쟁을 묘사하곤 했다. 시의 전반부는 포도주와 야광 술잔이란 시각적 이미지와 말 위에서 연주하는 비파소리란 청각적 심상이 인상적이다. 포도주도 비파도 모두 서역에서 온 것으로 변새의 풍정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런데 흥겨워 보이는 이 술자리에서 시적 화자는 몸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해 쓰러져 있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비웃지 말라고 외친다. 전쟁에 나가면 어차피 살아 돌아오기 어렵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억양 변화가 시에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후반 두 구의 시적 뉘앙스에 대해선 역대로 해석이 엇갈린다. 나라를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용기를 담았다거나 호방하게 술을 권하는 유머를 담은 말이라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두 번째 수에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자신의 처지에 대한 자조와 비탄에 더 가깝다.

2차 세계대전 중 독일과 소련의 전투를 그린 샘 페킨파 감독의 ‘철십자 훈장’(1977년)에서도 비슷한 모티프를 다룬다. 역전의 용사인 주인공 슈타이너 상사는 병사들을 사지로 떠미는 장교들을 혐오한다. 그는 부상병들을 위한 음식마저 차지하는 장군과 장교들에 대한 분노로 상을 뒤엎고 술을 빼앗아 마신다. 영화의 마지막, 슈타이너 상사는 패전해 쫓기면서도 철십자 훈장을 받는 데만 몰두하는 귀족 출신 장교를 비웃는다. 그 비웃음 소리가 단속적으로 이어지다 끝나는 순간 스크린엔 전쟁에 승리했다고 열광하지 말라는, 전쟁은 또 다른 전쟁을 낳을 뿐이라는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글이 인용된다. 한시와 영화 속 비웃음은 정반대다. 전쟁으로 인한 죽음의 공포는 비웃어선 안 되지만 전쟁의 야욕만큼은 비웃어 마땅하다.
#전쟁#스탠리 큐브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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