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터스포츠 역사 쓴 페라리 75주년… F1 경주 빠짐없이 출전하며 기술력 키워
올 시즌에는 터보차저-전기모터 결합… 6기통에 1000마력 넘는 ‘괴물 성능’
세계 정상급 모터스포츠 이벤트 포뮬러 원(F1) 선수권의 이번 시즌 첫 경주인 바레인 그랑프리가 20일 열렸다. 전과 달라진 규정과 경주차 등 새로워진 환경에서 10개 팀 20명의 선수가 출전해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100분 동안 진행된 결승 경주가 끝나는 순간 가장 큰 환호성이 터져나온 곳은 페라리 팀이었다. 페라리 팀 두 명의 선수가 1위와 2위를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경쟁 끝에 거둔 우승은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럼에도 페라리의 환호성이 유난히 컸던 이유는 이번 우승이 주는 의미가 남달랐기 때문이다.
이번 우승으로 페라리는 2019년 9월 이후 처음으로 소속 선수가 F1 경주 시상대 정상에 올랐다. 그 사이 열린 45번의 경주에서는 단 한 번도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다. 1950년에 F1 세계 선수권 대회가 처음 열리고 한 번도 빠짐없이 출전한 팀은 페라리가 유일하다. 그만큼 페라리는 F1의 간판 팀 역할을 해 왔고, 페라리에도 F1 출전은 가장 중요한 기업 활동이다. 그래서 페라리는 물론이고 페라리 오너들과 모터스포츠 팬들도 오랜만의 우승이 더 반가웠다.
이번 우승에 많은 이들이 열광한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있다. 올해로 페라리가 첫 차를 내놓은 지 75년이 되었다는 것. 당연히 페라리가 만든 첫 차는 경주차였고, 이는 곧 75년 전 페라리가 자동차 경주에 헌신하며 고성능 자동차를 개발 및 생산한다는 정체성을 확립했다는 뜻이다. 의미가 큰 해를 맞아 처음 치른 경주에서 차지한 우승은 한 우물만 파온 페라리의 75년 역사를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
페라리가 처음부터 직접 자동차를 개발하고 만든 것은 아니었다. 페라리 창업자인 엔초 페라리는 알파 로메오가 만든 차로 경주에 출전하는 팀을 이끌었다. 그 팀의 이름은 창업자의 성을 딴 스쿠데리아 페라리(Scuderia Ferrari)다. 스쿠데리아 페라리는 지금도 F1을 비롯한 페라리의 모터스포츠 활동을 주관하고 있는 사업부로 명맥을 잇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 알파 로메오와 결별한 페라리는 독자적으로 경주차를 만들어 경주에 출전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전쟁이 끝난 뒤에야 실현됐다. 그렇게 해서 처음 페라리의 이름과 페라리를 상징하는 카발리노 람판테(도약하는 말) 엠블럼을 단 차가 완성된 것이 1947년 3월 12일이었다.
엔초 페라리가 직접 이탈리아 마라넬로의 페라리 본사 문 밖에서 시험 주행을 했던 페라리의 첫 차 이름은 ‘125 S’였다. 모델 이름의 세 자리 숫자는 엔진의 기통당 배기량을 뜻했다. 12개의 기통을 V자 모양으로 배치한 엔진의 총 배기량은 1500cc였다. 125 S는 처음 출전한 경주에서는 기계적 문제로 완주하지 못했다. 그러나 두 번째로 출전한 경주에서 차지한 우승을 시작으로 같은 해 열린 13번의 경주에 출전해 6번의 우승을 거두며 페라리라는 이름을 모터스포츠 역사에 뚜렷하게 새겨 넣었다.
페라리라는 회사는 물론 페라리가 만든 차들도 세월의 흐름만큼 큰 변화를 겪었다. 125 S보다 개선한 엔진을 얹은 페라리의 첫 F1 경주차인 ‘125 F1’은 엔진 최고출력이 230마력에 불과했다. 그러나 페라리가 올해 F1 시즌에 투입한 최신 경주차 ‘F1-75’의 동력계가 내는 최고출력은 1000마력을 훌쩍 넘는다. 엔진 기통 수는 절반인 6개고, 배기량은 겨우 100cc 커졌을 뿐인데도 이처럼 엄청난 성능 차이가 나는 것은 F1-75의 최신 동력계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한 기술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F1-75의 동력계는 가솔린 엔진의 출력을 높이는 터보차저와 함께 배터리와 전기 모터를 결합한 하이브리드 시스템이다. 하이브리드 시스템의 전기 모터가 내는 출력만도 163마력에 이른다. 125 S의 V12 엔진이 냈던 출력보다 약 50% 더 큰 힘을 내는 셈이다. 사용하는 연료도 최신 규정에 따라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만든 에탄올(알콜) 10%를 혼합한 것이다. 이 연료는 엔진 출력을 떨어뜨리는 효과가 있지만, 탄소 배출을 줄이는 데에는 도움이 된다.
일반 도로를 달릴 수 있는 스포츠카들도 상전벽해와 같은 변화를 겪었다. 페라리는 초기에는 일반 도로에서 치러지는 경주에 출전할 수 있는 차를 일상에서 쓸 수 있도록 꾸며 판매했다. 즉 승용차의 탈을 쓴 경주차를 만들었다는 것. 1960년대 페라리를 대표하는 스포츠카인 250 시리즈가 이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그중에서도 경주차 인증을 위해 특별히 만든 ‘250 GTO’는 희소성과 더불어 아름다운 디자인과 강력한 성능을 겸비했다. 그 덕분에 250 GTO는 클래식카 경매에 나올 때마다 최고가 기록을 갈아치울 정도로 가치가 높은 차로 인정받고 있다.
페라리 스포츠카들이 1980년대까지 강력한 성능에 치중했다면 1990년대 이후에 나온 모델들은 편의성과 호화로움을 겸비한 럭셔리 스포츠카로 거듭났다. 특히 2013년에 선보인 라페라리에 처음 쓰인 하이브리드 시스템은 새 모델들이 나올 때마다 진화하며 신세대 페라리의 동력원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현재 판매되고 있는 ‘SF90’과 최신 모델인 ‘296 GTB’에도 하이브리드 동력계가 쓰인다. 이는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페라리의 변화를 보여준다.
엔초 페라리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최고의 페라리는 다음에 만들 차다.” 언제나 지금보다 더 나은 차를 만들겠다는 뜻으로, 혁신을 통해 더 빠르고 뛰어난 차를 만들겠다는 개발 방향이 담겨 있는 말이다. 이는 경주차뿐 아니라 일반 도로를 달릴 수 있는 스포츠카에도 해당된다.
물론 경주차의 기술이 고스란히 스포츠카로 이어지는 시대는 지났다. 그러나 모터스포츠에서 끊임없이 혁신해 온 것처럼, 페라리는 지난 75년간 그래왔듯 앞으로도 혁신을 통해 최고의 성능을 추구하는 스포츠카들을 내놓을 것이다.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기술로 더 짜릿한 스포츠 드라이빙의 즐거움을 줄 페라리의 새 차들이 기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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