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4월 5일, TV에서 강원 양양군 낙산사에서 큰 불이 나 보물 ‘낙산사종’이 소실됐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믿을 수 없는 소식이었다.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의 학예연구관으로 근무하던 최응천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63·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는 불과 3개월 전 낙산사를 찾아가 종을 직접 보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낙산사종은 영롱한 소리를 내며 제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얼마 뒤 다시 찾은 낙산사에는 높이 1.56m에 이르는 거대한 종은 사라지고 불에 녹아 쪼그라든 흉물만 남은 채였다.
“낙산사 종이 자아내던 아름다운 소리를 영원히 잃어버리고 말았어요. 그때 결심했죠. 언젠가 종소리까지 담아낸 한국 범종 아카이브를 구축해야겠다고.”
1989년부터 33년간 전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한국 범종을 연구해온 최 교수가 그간의 연구를 총망라한 신간 ‘한국의 범종’(미진사)을 최근 펴냈다. 29일 서울 마포구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서 만난 그는 “이 책은 일본, 중국 등 전 세계에 있는 한국 범종 363구를 기록한 아카이브”라고 말했다. 책에는 범종 41구의 종소리를 녹음한 QR코드도 담았다. ‘일승원음(一乘圓音·부처의 가르침)’을 상징하는 한국 범종의 미학을 온전히 전하기 위해 종이책에 종소리까지 담은 것이다.
일본 전역을 돌아다니며 한국 범종 48구를 직접 찾아낸 최 교수는 “아직까지도 1995년 후쿠이현(福井縣) 조구신사(常宮神社)에서 연지사종을 만난 순간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일본 소재 한국 범종을 연구하기 위해 1년간 일본 나라국립박물관 소속 연구원으로 지내던 때였다. 통일신라 833년 만들어진 연지사종은 경남 진주 연지사에서 보관해오다가 임진왜란때 왜구에 약탈당했다. 현재까지 조구신사가 소장중이다. 일본은 1953년 연지사종을 국보로 지정했다. 최 교수는 “종을 구석구석 살펴보고 싶은 마음에 필름만 100여 통 챙겨갔다”며 “하지만 보관고의 문을 연 순간 설렘은 탄식으로 바뀌었다”고 회상했다.
“종 표면이 녹슬어 곰팡이 쓴 듯 푸르뎅뎅했고 곳곳에 구멍이 나 있었어요. 어떤 국가가 국보를 이렇게 방치합니까.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었죠.”
최 교수는 연구를 마친 뒤에도 두 차례 조구신사를 찾았다. 특히 2018년 다시 만난 종의 상태는 처참했다. 종을 천장에 걸어두는 고리가 부식돼 천장에 매달지 못하고 바닥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것. 최 교수는 2018년 8월 연지사종의 실태를 알리는 학술대회를 열어 보존처리를 촉구했다. 결국 일본의 문화재연구소는 지난해 5월부터 연지사종 보존처리에 나섰다. 그의 휴대전화 배경화면은 아직까지도 1995년 촬영한 연지사종의 필름 사진으로 설정돼 있다. “녹슨 채 방치돼 있던 종의 모습을 기억하기 위해서”다.
그의 연구 덕분에 한국 범종의 약탈 증거를 찾기도 했다. 최 교수가 일본 아이치현(愛知縣)에 있는 ‘만다라지종’에 새겨진 글자를 분석한 결과 ‘천정(天正)’이라는 연호가 확인됐다. 일본에서 사용한 연호로 1593년을 뜻한다. 최 교수는 “1592년 임진왜란 때 조선의 어느 절에서 약탈한 뒤 일본에서 새롭게 연호를 새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책에는 한국 범종 363구를 소장 국가와 제작연대별로 분류한 31쪽 분량의 목록도 담겼다. 최 교수는 “앞으로도 저와 후학들이 목록에 새로운 사료를 더해나갈 것”이라며 “이 책은 33년 범종 연구의 끝이 아닌 시작”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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