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0세기초 서민층서 유행… 사대부 전유물 문인화와 달리
틀에 갇히지 않은 표현-진솔함… 현대 예술의 흐름과도 맞아
십장생도에 전자제품 일러스트 등… 21세기 세계 예술계에 영감
“한류 이끌 K아트 선두주자” 평가
지난달 28일(현지 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제94회 아카데미 시상식 기념 파티. 영국 배우 겸 가수 리타 오라가 검은 드레스에 인상적인 무늬의 가운을 입고 나타났다. 바닥까지 길게 늘어진 흰색 가운 위로 산과 소나무, 사슴이 그려진 한국 전통민화가 수놓여 있었다. 드레스를 제작한 패션디자이너 박소희 씨(26)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민화에서 영감을 얻었다. 민화는 이름 없는 평범한 예술가들이 그린 그림이다. 한국 민속예술의 멋을 공유하고 싶다”고 썼다.
18∼20세기 초 조선시대 서민층에서 유행한 민화가 21세기 세계 예술계에 영감을 주고 있다. 지난해 12월 미국 뉴욕 퀸스칼리지 아트센터는 한 달간 민화 전시를 열었다. 앞서 2016년 미국 클리블랜드미술관과 뉴욕 찰스왕센터, 캔자스대 스펜서미술관이 1년 넘게 ‘조선민화 특별전’을 연 데 이어 2020년 미국 뉴욕 패션공대(FIT) 미술관이 민화 전시를 개최했다. 시카고미술관은 2017년 발간 도록에서 폴 세잔의 정물화와 민화 ‘책거리’를 나란히 선보이며 ‘한국의 정물화’로 소개했다. 지난해 9월 디지털 아티스트 해더림은 장수를 기원하는 민화인 십장생도를 형상화한 배경에 전자제품을 배치한 일러스트를 내놓았다.
변경희 FIT 교수는 “민화는 한류를 이끌 K아트의 선두주자”라고 했다.
최근 주목받는 민화의 매력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개인의 욕구를 솔직히 드러내는 민화의 진솔함이 현대예술 흐름과 부응한다고 말한다. 민화는 백성의 그림이라는 뜻처럼 태생부터 사대부의 전유물이던 문인화와 결이 달랐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민간 화가들이 조선후기 평민의 수요에 맞춰 주문 제작한 게 민화의 시초. 19세기 상업 발달로 부를 축적한 평민이 등장한 결과였다. 문인화가 절제된 색상의 수묵화로 유교의 충효사상을 담았다면 민화는 백성들의 욕망을 거침없이 다뤘다. 파랑, 빨강, 노랑, 검정, 흰색의 오방색을 자유롭게 활용했고 거창한 사상이 아닌 개인의 행복을 기원하는 욕망을 반영했다. 윤진영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선임연구원은 “19세기 평민이 예술 향유의 주체가 되면서 민화 주제도 평범한 개인의 욕망으로 옮겨갔다”며 “민화는 문인화와 반대로 색을 자유자재로 표출하는 저항성을 내재하면서도 오방색만 사용한 ‘미니멀리즘’이 매력적”이라고 분석했다.
민화가 갖는 개방성도 빼놓을 수 없다. 모란, 까치, 호랑이 등 유사한 소재를 활용하되 틀에 갇히지 않는 표현으로 재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는 것. 예컨대 책장에 진열된 사물을 그린 책거리는 당대 흔히 볼 수 있는 민화 양식이지만 그림 속 사물은 제각각이다. 책장에 반짇고리와 은장도, 비단신 등 여성의 물건을 배치한 작품들은 당시 예술을 향유하던 여성의 주체성을 보여준다. 정병모 경주대 문화재학과 교수는 “책거리, 모란도 등 반복되는 소재를 파격적으로 표현하는 민화의 개방성은 그래픽아트 같은 현대예술과 접목해 활용하기가 용이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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