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下〉
성인의 주검 들어온 ‘땅끝 마을’
‘신세계와의 조우’ 바이요나
‘인디아노스’ 영광 빛나는 영국길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은 산과 들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 800km를 걷는 ‘프랑스길’이 가장 유명하지만, 포르투갈이나 영국에서 출발한 순례자들이 콤포스텔라를 향해 걷는 해안길도 색다른 풍광을 선사한다. ‘죽음의 해안’으로 불리던 대서양 해안길은 신대륙 탐험의 치열한 각축장이었으며, 순례자들에게는 세상 끝에서 다시 태어나 새로운 삶을 꿈꾸게 하는 길이었다.》
○ 세상의 끝, 피니스테레
대서양은 유럽인들에게 ‘세상의 끝(The End of the World)’이었다. 해가 지는 곳. 거센 폭풍우가 치는 바다. 사람은 더 이상 갈 수 없는 땅이었다. 그런데 전설에 따르면 이곳으로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 야고보(산티아고)의 시신이 들어왔다. 팔레스타인에서 참수를 당해 순교했던 야고보는 돌을 싣는 배에 태워져 스페인 북서부 파드론 해안에 도착한 것이다.
순례길의 종착지인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 대성당 지하에서 야고보의 무덤을 찾은 순례객 중 일부는 다시 한번 바닷길 순례에 나선다. 콤포스텔라에서 100km가량 떨어진 ‘피니스테레’다. ‘Finis(끝)’ ‘Terre(땅)’는 스페인어로 ‘땅끝 마을’이다. 산티아고 대성당과 함께 또 다른 순례의 종착지다. 그래서 피니스테레에 있는 조개껍데기 문양의 이정표에는 0.0km라는 표시가 돼 있다. 피니스테레는 대서양에 툭 튀어나온 반도의 끝에 있는 바위다. 등대 밑 바위에는 청동으로 만든 등산화가 있다. 거센 바람에 몸이 날아갈 정도로 휘청이는데도, 사람들은 바위 위에 앉아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중세 시절부터 순례객들은 피니스테레의 바위 밑에서 옷과 신발을 태웠다. 얽매여왔던 과거의 삶(옷)을 버리고, 새롭게 태어나길 바라는 의식이다. 지금은 금지됐지만 바위 사이에는 여전히 그을음 자욱이 남아 있다.
숙연한 기분이 드는 것은 바로 이 바다가 ‘죽음의 해안(A Costa da Morte)’이라 불렸기 때문이다. 폭풍우와 암초 때문에 이 바다는 수많은 난파선의 무덤이다. 피니스테레에서 차로 1시간 거리인 무시아 해변에서는 2002년 유조선 프레스티지호(4만2000t급)가 침몰해 자원봉사자들이 기름범벅이 된 바위를 닦아내기도 했다. 무시아 해변에는 그 당시의 아픔을 기억하는 쪼개진 돌로 된 조각상이 서 있다. 무시아 해변은 야고보 성인이 이베리아 반도에 선교여행을 왔을 때 들어왔던 곳. 폭풍우 속에서 바닷가 바위 위에 나타난 성모 마리아의 도움으로 무사히 상륙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갈리시아 서북쪽 항구 코루냐에도 로마시대부터 등대로 사용된 ‘헤라클라스 타워’ 앞에 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는 샤론의 조각상이 서 있다. 사람이 죽으면 건너는 스틱스 강을 건너게 해주는 뱃사공이다. 이렇듯 유럽인들에게 대서양은 황천강, 요단강과 같은 ‘삶과 죽음의 경계’였다. 그런 의미에서 콜럼버스의 항해는 더욱 큰 의미를 갖는다. 아무도 감히 넘지 못했던 죽음의 바다를 용감하게 건너가 새로운 신세계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신대륙 발견의 첫 뉴스, 바이요나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출발해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로 가는 해안길은 포르투를 거쳐 스페인 국경과 마주하는 미뉴강 하구를 만난다. 미뉴강 다리에서 콤포스텔라까지는 약 110km. 도보로 100km 이상만 걸으면 완주 증명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순례자들이 이곳을 포르투갈길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해안길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한 소식을 유럽에서 가장 먼저 알게 됐던 바이요나 항구로 이어진다. 콜럼버스의 선단 중 핀손 선장이 이끄는 라핀타호가 1493년 3월 1일에 바이요나에 도착했다. 콜럼버스가 탄 ‘라니냐호’는 사흘 뒤인 3월 4일 리스본에 도착한다. 그래서 바이요나에서는 매년 3월 첫 주말에 ‘도착 기념 축제’가 성대하게 펼쳐진다.
바이요나 성채 바로 아래에는 ‘두 세계의 조우’라는 조각상이 서 있고, 항구에는 복제한 라핀타호(전장 17m)가 떠 있다. 테니스 코트보다 작은 범선으로 대서양을 건너 인도까지 갈 발상을 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울 뿐이다. 바이요나 항구 주변에는 성채에는 4km 구간의 산책길이 조성돼 있다.
갈리시아의 해변엔 아일랜드, 스코틀랜드에서 살던 켈트족들이 살던 흔적과 문화가 남아 있다. 과르다 해안의 해발 350m 높이의 성프란시스코 산 주변에는 고대 로마시대 이전에 켈트족이 살던 돌집 유적이 3000여 개나 남아 있다. 코루냐의 헤라클레스 타워 앞에는 스페인에 건너온 켈트족의 영웅 ‘브레오강’의 석상이 서 있고, 도시의 광장에서는 스코틀랜드에서나 들을 수 있는 백파이프 연주 소리가 울려퍼진다.
이어지는 해안길은 항구도시 비고다.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축구클럽 ‘셀타비고’로 유명한 도시다. ‘셀타(Celta)’는 스페인어로 켈트족이라는 뜻. 비고 앞바다는 유럽의 치열한 세력다툼의 역사를 안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1702년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당시 펼쳐졌던 ‘비고만(Vigo Bay) 해전’이다.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긁어온 금은보화를 가득 실은 스페인 보물선 3척과 상선 13척이 영국 해군에 의해 나포당하거나 침몰했다. 스페인은 보물선의 약탈을 피해 자침(自沈)을 택하기도 했다. 이 이야기는 프랑스 소설가 쥘 베른의 소설 ‘해저 2만 리’(1869년)의 배경이 됐다. 상상 속의 잠수함 노틸러스호의 네모 선장은 돈이 필요할 때마다 비고만을 찾아 침몰한 스페인 보물선에서 금을 찾아 쓰는 장면이 나온다.
해안길에서 만난 스페인 순례자 후안 씨(53)는 “화가이면서 록밴드에서 기타를 연주하는데, 카미노를 걸으며 바다와 산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음악적 영감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인디아노스의 성공과 눈물, 영국 루트
영국길은 영국이나 아일랜드에서 배를 타고 온 순례자들이 갈리시아 북서쪽 페롤이나 코루냐 항구에 도착해 콤포스텔라까지 걸어서 가는 길이다. 상대적으로 짧아 1주일 정도 여행하는 유럽 순례자들이 즐겨 애용하는 길이다. 1975년 스페인의 세계적인 패션브랜드인 ‘자라(Zara)’가 첫 매장을 열었던 항구도시 코루냐는 건물마다 화이트 발코니라고 불리는 ‘갈레리아스’가 아름답게 빛난다.
영국길 순례길의 주요 도시인 베탄소스의 시청 앞 광장에는 아르헨티나에 이민을 가서 큰돈을 벌어 온 ‘인디아노스(Indianos)’ 가르시아 형제의 동상이 서 있다. 그들은 고향에 돌아와 학교와 병원, 보육원과 양로원, 축구장과 성당 등을 짓는 데 엄청난 재산을 기부했다. 이들처럼 아메리카 대륙 이민으로 성공한 뒤 귀향한 사람을 스페인에서는 ‘인디아노스’라고 불렀다. 순례길 가이드 세르히오 씨는 “코루냐, 비고 등의 항구는 20세기 초 스페인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중남미 대륙으로 대규모 이민을 떠나간 곳”이라며 “쿠바의 혁명가 피델 카스트로의 아버지도 이곳 출신으로 이민을 갔던 사람”이라고 말했다.
베탄소스로 들어오는 올드 브리지 게이트 앞에서 헝가리에서 온 남매 순례객 아담 씨(32)와 펀니 씨(28)를 만났다. 아담 씨는 “오랜만에 여동생과 만나 대화도 나누고 성당에서 가족을 위해 촛불도 켜면서 걷고 있다”고 말했다.
그들처럼 카미노는 일생일대의 도전이거나 고행의 길만은 아니다. 아름다운 바다와 산, 들판, 별빛, 꽃을 바라보면서 노래 한 곡, 시 한 구절을 떠올려도 충분히 좋은 여행으로 여기며 걷는 사람들이 많았다. 문어, 조개, 홍합 같은 싱싱한 해산물 요리와 갈리시아 특산 알바리뇨 품종의 화이트 와인은 여행의 좋은 동반자가 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