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은 산과 들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 800km를 걷는 ‘프랑스길(Caminos France)’이 가장 유명하지만, 포르투갈에서 출발해 해안길을 걸어가는 순례길은 색다른 풍광을 선사한다. 수백년 전부터 해외에서 온 순례자들은 돛단배를 타고 거센파도가 몰아치는 이베리아 반도 서북쪽 해안에 도착했다. 그리고 도보로 콤포스텔라까지 계속 걸어갔다. ‘세상의 끝’(The End of the World)으로 여겨졌던 대서양 바닷길. ‘죽음의 해안’으로 불리던 이곳은 신대륙 탐험의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던 현장이었으며, 순례자들에게는 죽음을 명상하며 새로운 삶을 꿈꾸게 하는 길이었다.
● 세상의 끝, 피니스 테레
대서양은 유럽인들에게 ‘세상의 끝’이었다. 해가 지는 곳. 거센 폭풍우가 치는 바다. 사람은 더 이상 갈 수 없는 땅이었다. 그런데 전설에 따르면 이 해변으로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 야보고의 시신이 들어왔다. 팔레스타인에서 참수를 당해 순교했던 야고보는 돌을 싣는 배에 태워져 파드론 이리스 플라비아 해안에 도착했다. 지중해를 건너고, 지브롤터 해협을 지나, 이베리아 반도를 거슬러 올라가 스페인 북부 앞바다에 도착한 기적의 바닷길이다.
순례길의 종착지인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 대성당 지하에서 산티아고의 무덤을 찾은 순례객 중 일부는 대서양 바닷길까지 다시한번 순례에 나선다. 콤포스텔라에서 100km 가량 떨어진 ‘피니스테레’다. ‘Finis(끝)’ ‘Terre(땅)’는 그야말로 스페인어로 ‘땅끝 마을’이다. 산티아고 대성당이 목적지였다면, 산티아고의 시신이 도착한 이 곳도 또다른 종착지다. 그래서 피니스테레에 있는 조개껍데기 문양의 이정표에는 0.0km라는 표시가 돼 있다.
피니스테레는 대서양 바다 위로 툭 튀어나온 반도의 끝에 높이 솟은 바위다. 폭풍우와 암초가 많아 배의 항로를 유도하는 등대에서 밤이면 불빛과 기적소리를 낸다. 이 곳의 바위 위에는 청동으로 만든 등산화가 있다. 불어오는 거센바람에 몸이 날아갈 정도로 휘청거린다. 그래도 사람들은 바위 위에 앉거나 서서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등대의 해안절벽 바위에는 누군가 ‘세상의 끝을 따라서’(Sego Fin du Monde)라는 글을 써놓았다. 사람들은 세상의 끝에서, 죽음의 바다에서 새로운 삶을 꿈꾼다. 카미노를 통해 여기까지 걸어온 스스로의 여정으로 돌이켜보며, 자신이 살아온 인생도 돌아본다. 나 자신은 어떤 사람이었던가를 고독하게 생각하기도 하고, 순례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그런데 여정의 끝은 죽음이라는 절벽이다.
중세시절부터 순례객들은 피니스테레의 바위 밑에서 옷과 신발을 태웠다. 수백 km에 이르는 순례길과 함께 해왔던 옷은 자신을 얽매여왔던 과거의 삶을 뜻한다. 세상의 끝에서 죽음을 마주하며, 새롭게 태어나길 바라는 의식이다. 지금은 금지됐지만 아직도 바위 사이에는 시커먼 그을음 자욱이 있는 곳이 있다.
이 바다에서 숙연한 기분이 드는 것은 바로 ‘죽음의 해안’(La Coast da Morte)이라 불렸기 때문이다. 워낙 폭풍우도 많이 불고, 암초가 많아 역사적으로 이 앞바다에서는 수많은 배가 난파했다. 로마인들은 태양이 바닷 속으로 빠져 죽음을 맞이하는 이 곳을 태양신에게 바쳤다고 한다.
이 앞바다에서는 사건이 요즘에도 해양조난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피니스테레에서 차로 1시간 거리인 무시아 해변에서는 2002년 유조선 프레스티지호(4만2000t 급)가 침몰해 자원봉사자들이 기름범벅이 된 바위를 닦아내기도 했다. 무시아 해변에는 그 당시의 아픔을 기억하는 커다란 쪼개진 돌로 된 조각상이 서 있다.
무시아 해변은 야고보 성인이 이베리아 반도에 선교여행을 왔을 때 들어왔다는 곳. 당시 폭풍우가 폈는데 바닷가 바위 위에 나타난 성모 마리아의 도움으로 무사히 상륙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성모님이 발현한 두 개의 돌은 ‘아발라(움직이는 돌)’와 ‘카데라(콩팥 모양의 돌)’로 순례자들이 올라가거나 바위 밑에 통과하며 사진을 찍는 곳이다. 그런데 기자가 찾아갔을 때는 거센 파도 때문에 바위 근처도 가기가 힘들었다.
이처럼 위험한 대서양을 ‘죽음의 해변’이라고 생각해서일까. 갈리시아 서북쪽 코루냐 항구에 로마시대부터 등대로 사용된 유명한 헤라클라스 타워 앞에는 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는 샤론의 조각상이 서 있다. 사람이 죽으면 건너는 스틱스 강을 건너게 해주는 뱃사공이다. 유럽인들에게 대서양은 스틱스강, 황천강, 요단강과 같은 삶과 죽음의 경계이며, 세상의 끝이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콜롬부스의 항해는 더욱 큰 의미를 갖는다. 아무도 건널 생각을 못했던 ‘죽음의 바다’에 나아가 새로운 신세계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 신대륙 발견의 첫 뉴스, 바이요나
산티아고 순례길 포르투갈 해안길은 바이요나 항구로 이어진다. 항구 주변에는 거대한 성채가 있다.바요나는 콜롬부스의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배가 가장 먼저 도착해, 아메리카 발견 뉴스를 가장 먼저 스페인에 알린 영광을 갖고 있는 항구다. 콜롬부스의 선단은 3대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떠났는데, 콜롬부스가 탔던 산타 마리아호가 폭풍우에 휘말려 바다에 침몰했다고 한다. 그래서 2대의 배가 귀국하던 중 바다에서 헤어졌는데, 핀손 형제가 선장으로 있던 라핀타호가 바이요나 항구로 1493년 3월1일에 가장 먼저 도착했다. 그리고 콜롬부스가 탄 ‘라니냐 호’는 사흘뒤인 3월4일 리스본으로 도착했다고 한다.
그래서 바요나 항구에는 ‘도착(Arribada)기념비’가 서 있다. 그리고 매년 3월1일이 있는 첫째주 주말에는 ‘도착기념 축제’(Festa da Arribada)가 성대하게 열린다. 바요나 성채 바로 아래에는 ‘두 세계의 조우’(Encounter between the two world)라는 조각상이 있다. 이사벨라 여왕이 한 손은 하늘로 뻗은 채 서 있고, 맞은편에는 아메리카 원주민 엄마와 아기, 망치를 든 켈틱인 등이 조각된 5개의 군상이 표현돼 있다.
또한 바이요나 항구에는 라핀타호도 똑같은 크기로 복원돼 바다에 떠 있다. 전장 17m의 라핀타호는 테니스 코트보다도 작은 크기다. 그런데 저렇게 작은 범선으로 대양을 건너 인도까지 갈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무모하면서도 일생일대의 목숨을 건 도전이었음에 틀림없다. 라핀타호가 들어올 때 배에는 아메리카 원주민 3명도 노예로 끌고 왔다고 한다. 유럽에 온 최초의 아메리카 인디언이었다. 그들은 바요나에서 살다가 죽었다.
바요나에는 핀손 선장의 동상을 비롯해 선원들이 물을 담았던 우물, 항해루트를 그려놓은 타일, 기념비와 조각품 등 수많은 ‘도착’ 기념물이 있는데, 이 곳에 살았던 유럽 최초의 아메리카 인디안을 위한 어떤 기념물도 없는 것은 허전함을 느끼게 했다.
바이요나 항구 주변에는 거대한 성채가 있다. 바다로 둘러싸인 성채를 한바퀴 돌며 4km 구간의 산책길이 조성돼 있다. 성채 속에 중세수도원을 개조한 5성급 국영호텔인 파라도르가 최고의 전망을 선사한다. 바다 위에는 굴, 조개, 홍합 등을 양식하는 ‘바테아(Batea)’가 군데군데 떠 있다.
● 포르투갈 해안길과 영국길
대서양을 접하고 있는 이베리아반도의 서쪽 해안은 남쪽은 포르투갈, 북쪽은 스페인 갈리시아 지방이다.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출발한 순례자들은 포르투를 거쳐 스페인 국경과 마주하는 미뇨강 하구를 만난다. 스페인 갈리시아 지방의 들판을 유유히 흐르는 미뇨 강은 투이(Tui)에서 대서양으로 흘러나간다. 낙동강이나 한강 하구처럼 강폭이 넓어져 삼각주를 형성하면서 대서양과 만난다.
투이에는 미뇨 강 옆 언덕에 거대한 성채와 같은 산타마리아 대성당이 있다. 산타마리아 대성당의 지붕 위에서 바라보면 미뇨 강 건너에도 성채가 보인다. 포르투갈의 도시 발렌사 도 미뇨다. 스페인의 뚜이와 포르투갈의 발렌사는 철교로 이어져 있다. 미뇨강 다리에서 산티아고콤포스텔라까지는 114km. 도보로 100km 이상만 걸으면 완주 증명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순례자들이 이곳을 포르투갈길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포르투갈길은 카미노(순례길)는 내륙으로 가는 길이 있고, 해안을 따라 가는 길 두가지가 있다.
스페인 순례자 후안 씨(53)는 11일간 해안길을 249km를 걸었다고 한다. 화가이면서 취미로 록밴드에서 기타를 연주한다는 그는 “카미노를 걸으면서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영감을 받아 노래를 만든 것이 가장 큰 보람”이라 말했다.
갈리시아의 해변은 영국의 해적이나 아일랜드, 스코틀랜드에서 살던 켈트족들이 침입해오거나 살았던 흔적이 많다. 과르다 해안의 해발 350m 높이의 성 프란시스코 산에서는 주변에는 기원전 고대 로마시대 이전에 켈트족이 살던 돌집들이 3000여 개나 남아 있다. 중앙에 화덕을 중심으로 한 주거지는 지붕을 올렸던 지푸라기만 없을 뿐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항구도시 코루냐의 로마시대부터 사용됐던 등대인 헤라클레스 타워 앞에는 스페인에 건너온 켈트족의 영웅 ‘브레오강’의 석상이 서 있다. 수염을 기른 브레오강은 방패와 칼을 들고 있는 전사의 모습이다. 폰테베드라 광장에서는 스코틀랜드에서나 들을 수 있는 백파이프 연주 소리가 울려퍼진다.
스페인 프리메가리가 축구클럽인 셀타비고는 항구 도시 비고의 자랑거리다. ‘셀타(Celta)’는 스페인어로 켈트 족이라는 뜻이다. 유럽 각국의 치열한 전장이었던 비고 앞바다는 신대륙에서 싣고 온 황금 보물선이 수없이 침몰됐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대표적인 것이 1702년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당시 펼쳐졌던 ‘비고만(Vigo Bay) 해전’이다.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긁어온 금은보화를 가득실은 스페인 보물선 3척과 상선 13척이 영국 해군에 의해 나포당하거나 침몰했다. 영국 함대는 금과 은 4512파운드를 약탈했는데, 스페인은 보물선의 약탈을 피해 자침(自沈)을 택하기도 했다. 이 이야기는 프랑스 소설가 쥘 베른의 소설 ‘해저 2만리(1869년)’에 영감을 주었다. 상상 속의 잠수함 ‘노틸러스’호의 네모 선장은 돈이 필요할 때마다 비고만을 찾아 침몰한 스페인 보물선에서 금을 찾아 쓰는 장면이 소설 속에 나온다.
포르투갈 해안길을 걷다보면 ‘파소(Pazo)’로 불리는 귀족들의 대저택의 아름다운 정원도 구경할 수 있다. ‘파소 도 파라메이요’는 1714년부터 1895년까지 왕립 제지공장으로 사용됐던 집이다. 틴토강 계곡의 물을 집 안으로 끌어들여 정원 앞으로 흐르고 있고, 작은 채플과 와인 창고가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틴토강은 산티아고의 유해가 바다로 도착한 파드론의 이리아 플라비아로 이어진다고 한다. 이 집의 10대 손인 곤잘로 리베로 씨는 “산티아고 유해를 발견한 사람들이 어깨에 메고, 틴토강을 따라서 별빛이 비치는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까지 갔다”며 “바로 이 길이 첫 번째 카미노(순례길)였다”고 말했다.
@@@
● 인디아노스의 성공과 눈물, 영국 루트
영국이나 아일랜드에서 배를 타고 온 순례자들은 갈리시아 북서쪽에 있는 페롤리나 코루냐 항구에 도착한 후 콤포스텔라까지 걸어서 이동한다. 상대적으로 짧은 구간이어서 1주일 정도 여행하는 유럽 순례자들이 애용하는 길이다.
영국길에 있는 가장 큰 항구도시인 코루냐는 1489년 영국의 해적왕 프랜시스 드레이크의 침입에 맞서 결사항전을 통해 도시를 지켜냈던 스페인 여성전사 마리아 피타(1565~1643)의 동상이 시청앞 광장에 서 있다. 스페인의 잔다르크로 불리는 여성 헤로인이다.
코루냐는 또한 1957년 스페인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패션브랜드인 ‘자라(Zara)’의 첫 매장이 오픈한 곳이기도 하다. 항구도시라 바람이 많이 불어 건물마다 비바람을 막고, 햇빛도 반사해주는 하얀색 발코니를 설치해놓았다. ‘갈레리아스’로 불리는 화이트 발코 덕분에 이 도시는 ‘유리의 도시’(City of Glass)로 불린다. 푸른 하늘과 흰색 창틀이 동화 속 풍경을 연출해낸다.
영국길 순례길의 주요도시인 베탄소스의 시청 앞 광장에는 1869년 아르헨티나에 이민을 가서 큰 돈을 벌어 온 가르시아 나베이라 형제의 동상이 서 있다. 부자가 된 가르시아 나베이라 형제는 24년 만인 1893년 고향으로 돌아와서 학교와 병원, 고아원과 양로원, 축구장과 성당 등을 짓는 데 엄청난 재산을 기부했다. 그들의 장례식 때 어마어마했던 행렬을 찍은 사진이 그들에 대해 주민들이 얼마나 고마워했는지를 증언해준다.
이렇듯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민을 가서 성공한 뒤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을 스페인에서는 ‘인디아노스(Indianos)’라고 불렀다고 한다. 콜롬부스가 서인도 제도를 발견했다고 믿었던 데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처럼 20세기 초 스페인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 비고, 코루냐의 항구에서 아르헨티나, 쿠바, 멕시코, 미국 등 대규모 이민을 떠났다. 가이드 세르히오 씨는 “쿠바의 혁명가 피델 카스트로 아버지도 스페인 갈리시아 지방에서 이민을 갔던 사람”이라고 말했다.
베탄소스 시내로 들어오는 올드 브릿지 게이트 앞에서 헝가리에서 온 아담(32)과 펀니(28)를 만났다. 각각 스위스와 헝가리에서 일하고 있는 남매는 7일간의 휴가를 내고 페롤 항구부터 코루냐, 산티아고에 이르는 123km 순례길을 걷고 있었다. 아담 씨는 “영국 루트가 가장 짧고 풍경도 좋기 때문에 이 길을 택하게 됐다”며 “오래 전부터 여동생이랑 함께 카미노를 걷기로 약속했는데, 여동생과 오랜만에 대화도 나누고 성당에 들러 가족을 위해 촛불도 켜면서 걷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유럽의 순례객들은 짧은 구간을 1,2주 단위로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에게 카미노는 심각한 일생일대의 도전이거나 나 자신을 찾는 고행의 길만은 아니다. 아름다운 바다와 산, 들판, 별빛, 꽃을 바라보면서 노래 한곡, 시 한 구절이 떠올라도 좋은 길인 셈이다. 문어, 조개, 홍합 같은 싱싱한 해산물 요리와 갈리시아 특산 알바리뇨 품종의 화이트 와인은 여행의 좋은 동반자가 된다.
댓글 0